- 평면의 역사 / B. W. 힉맨 지음, 박우정 옮김 / 소소의책
이동 돕는 도로·다져진 경관
산림 개간·토지공사의 산물
자연에 대한 인간 승리의 상징
미래 온난화로 해수면 상승땐
섬나라 상당수 평평한 바다로
평면에 관한 시각 넓혀야할 때
하지만 인간의 손이 잘 닿지 않는 자연에서 평면은 희귀한 현상이다. 이를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자. 평면이라고 볼 수 없는 첩첩이 쌓인 산봉우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우리가 도시에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평평한 아스팔트 포장도로도 도시와 멀어지면 점점 차로가 줄어들다가 마침내 비포장도로와 만난다. 인간은 왜 자연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는 특징인 평면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쓸까. 저자는 이 질문을 바탕으로 기하학, 지리학, 종교, 과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를 종횡하며 평면의 개념, 인간이 평면을 인식하는 방식, 인간이 인위적으로 평면을 만드는 이유를 다각적으로 분석한다.
평면을 빼놓고 현대 문명 사회를 논할 수 없다. 현재 총연장 약 5000만㎞로 추산되는 도로는 전 세계 인류와 물자의 이동을 돕는 모세혈관 역할을 하고 있다. 도로가 없는 물류와 교통은 상상할 수 없다. 총연장 약 100만㎞에 이르는 철도는 평평하게 다져진 농경지와 공단, 평면으로 채워진 도시를 촘촘하게 연결한다. 평평하게 다져진 경관의 대부분은 산림 개간, 토지 공사의 산물이다. 인간의 이동과 활동을 편리하게 만드는 평면은 자연을 파괴하지만, 사회적·경제적으로는 큰 효용을 갖추고 있다. 평면은 자연이 갖고 있는 지형의 다양성에 대한 인공적인 공간의 승리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평면은 태생적으로 자연을 거스른 결과물인 만큼 폄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평평함’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Flatness’의 또 다른 의미는 ‘평범함’ ‘지루함’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평면적’이란 단어의 의미 중 하나는 ‘겉으로 나타난 일반적인 사실만을 논의하거나 표현하는 것’이다. 문학은 오스트레일리아 사막, 미국 대평원처럼 아득하게 펼쳐진 넓은 평면을 불안, 외로움 혹은 광기의 장소로 묘사하기도 한다. 빈약한 가슴, 납작한 얼굴, 낮은 코를 가진 사람은 종종 조롱을 받는다. 평면은 실용적일지언정 매력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언어에 반영돼 있다는 증거다. 이렇듯 저자는 평면을 대하는 우리의 상반된 인식을 함께 소개하며 평면을 이해하는 일이 우리의 일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이 평면을 인식하는 방식과 인위적으로 평면을 만드는 이유를 살핀 저자는 지구의 환경 변화가 미래의 평면에 미칠 영향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 예컨대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계속 높아지면 해발고도가 낮은 섬나라들 상당수는 바닷물에 잠겨 평평한 바다로 보이게 될 것이다. 만약 핵전쟁이 벌어진다면 현대 인류가 이룩한 모든 게 파괴돼 세상의 풍경이 황량한 평면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이를 통해 저자는 평면이 인류의 열망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시각의 전환을 유도한다.
아울러 저자는 평면이 절대적인 개념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서 있는 공간에 따라 평면은 평면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다에서 배는 평평한 대양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대양의 표면은 곡선을 그리고 있다. 우주에서 지구의 바다를 바라보면 평면이란 개념조차 사라진다. 지구의 바다는 우주에서 바라보면 둥글게 뭉쳐 있어 공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평면으로 보이는 포장도로는 개미와 같은 작은 곤충에게도 평면으로 보일까. 개미에게 포장도로 표면의 크고 작은 굴곡은 마치 커다란 웅덩이나 장애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현대 인류는 지금도 끊임없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전 세계 곳곳에서 자연을 평면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평면은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떠받치는 기반이다. 우리는 존재의 근거인 평면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평면이 계속 자연을 훼손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평면에 관한 이해와 평면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히는 일이 시급하지 않을까. 이 책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이자 숙제다. 324쪽, 2만3000원.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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