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파주에 자리한 사적 제525호 이이 유적.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율곡 이이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 정경, 이이와 신사임당의 동상, 율곡기념관.
경기 파주에 자리한 사적 제525호 이이 유적.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율곡 이이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 정경, 이이와 신사임당의 동상, 율곡기념관.

■ 박현모의 한국형 소통이야기 - ① 인사실패 사례 : 1582년 이이

- 역사인물학
동인·서인 양쪽서 공격당해 9개월·13개월만에 파직… 개혁 정당성만 강조한 채 실행역량은 부족
발탁한 인재로 개혁 성공하게 하려면 ①명분 ②지지세력 ③실권 ④기득권층으로부터 보호 필요


“인사를 잘못해 망한 사례는 없습니까?”

며칠 전 모 기업의 임원들을 대상으로 ‘세종의 인재경영 12훈(訓)’을 강의했다. 세종이 어떤 인사 철학을 가지고 어떻게 인재를 헤아리고(測人) 교육하며(敎人) 요직에 배치했는지(選人)를 열두 항목으로 나눠 살펴봤다. 강의가 끝나고 다담(茶談)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 기업의 인사 담당 임원은 “‘사람 얻는 일이 최우선(得人爲最)’이라는 세종의 말이 크게 와닿는다”면서 그 일을 잘못해 실패한 사례가 궁금하다고 했다. 잘한 사례보다는 실패한 사례를 보고 반면교사로 삼는 게 일하는 사람에게는 더 잘 와 닿는다는 게 그분의 얘기였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서 최악의 인사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게 있을까? 나는 1582년(선조 15년)에 선조가 율곡 이이를 이조판서에 임명했다가(1월) 얼마 안 있어 또 병조판서로 제수한 것(12월)을 대표적인 예로 꼽는다. 어떤 이는 뛰어난 인재인 이이를 요직에 앉히는 게 왜 잘못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겉으로 볼 때 율곡이 ‘동호문답’에서 서술했던 인재 쓰기의 도(道)를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게 해 줬고(이조판서), ‘십만 양병설’ 같은 자강(自彊)의 국방정책을 실현할 기회가 생긴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다(병조판서). 실제로 당시에 율곡만큼 시대의 폐단을 잘 알고 또 그 대책을 고민한 사람도 드물었다.

문제는 선조의 인재 쓰기 방법에 있었다. 선조는 율곡이 오랫동안 구상해온 대책을 실현할 여건을 만들어 주지 않고 그저 ‘자리’만 내맡겼다. 그 여건의 하나는 판서의 임기와 재량권이었다. 우선 이조판서 기간 9개월과 병조판서 기간 13개월은 무엇을 시도하기엔 너무 짧았다. 게다가 이이가 지적한 것처럼, 당시 인사의 실권은 이조판서가 아니라 그 아래 낭관(郎官·실무 책임을 맡은 5품 정랑과 6품 좌랑)에게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이조에 주어졌던 관료들에 대한 감찰권마저 폐지된 상태였다. 그 전에는 이조에서 관리를 임명하고, 직무 수행 여부를 감찰해 잘못하는 자를 그때그때 제거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조는 벼슬 임명하는 일을 관장하고 있을 뿐이어서 모든 부서(百司)의 기강이 무너지고 온갖 일이 그르쳐지고 있다”는 율곡의 지적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이이는 동인과 서인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서인 심의겸은 동인 김효원에 대해 명종 때의 척신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그를 배척했고, 김효원 역시 심의겸을 그가 외척, 즉 명종왕비인 인순왕후의 동생이라는 점을 내세워 공격했다. 하지만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국왕 선조의 편파적인 조처, 그리고 이이의 어설픈 처신이었다. 선조는 김효원과 심의겸이 서로 굽히지 않고 대결하자 두 사람을 외직에 보내 잠잠하게 하자는 이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문제는 심의겸을 도성과 가까운 개성 유수로 발령 낸 데 비해 김효원은 멀리 함경도 부령 부사로 보낸 점이다(선조실록 8년 10월 24일). 이후 두 사람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이의 의도와 달리 더욱 “원수처럼 서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김효원 쪽 사람들은 ‘조정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며 더욱 강하게 심의겸 쪽 사람들을 공격했다.

1579년(선조 12년) 무렵이 되자 동인들은 그 이전과 달리, 이이가 제시하는 정책 제안까지도 “망발”(김우옹)이라느니 “경솔하다”(유성룡)느니 하며 일체 부정했다(선조실록 12년 6월 8일). 선조의 애매한 태도도 동인들의 이이 공격을 가속시켰다. 이이가 서인 쪽에 서서 균형을 잡으려는 태도에 대해 “감히 스스로 강변(强辨)하고 있는데 그것이 마땅한지 모르겠다”는 선조의 반응을 본(선조실록 12년 6월 22일) 동인 쪽 신하들은 이이를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이를 결정적으로 난관으로 몰고 간 계기는 변방으로부터 왔다. 4년 뒤인 1583년(선조 16년)에 여진족인 니탕개가 북변에 침입했는데, 이때 보인 병조판서 이이의 언행에 대해 언관들이 강력하게 탄핵했다. 당시 이이는 선조의 구언(求言)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6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그 요지는 이번 기회에 군사를 일으켜 토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선조실록 16년 2월 10일). 뜻밖에도 선조는 “아뢴 대로 하라”고 이이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런데 불과 7일 뒤에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이이가 현재 논척(論斥)을 받고 있는 상황인데도 (자숙하지 않고) 대궐 문에 나와 자기 죄가 무어냐고 항변하는 등 공론(公論)을 경멸했다”고 탄핵했다. 어이없게도 선조는 이이를 파직하라고 명령했다(선조실록 16년 2월 17일).

이처럼 선조가 미덥지 못한 행동을 보이자 이이는 왕에게 한가한 날 만나서 차근차근 아뢰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간 권극지 등이 비판하고 나섰다. 이이가 경연 자리가 아닌 곳에서 무시로 국왕 면담을 요청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선조실록 16년 윤2월 15일). 어느 쪽에서도 양보라곤 전혀 없고 오로지 “독기를 품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데 전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이가 설 곳은 없었다. 물론 왕자의 사부 하낙(河洛)이 이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변호했고(선조실록 16년 8월 5일), 성균관 유생 유공진 등도 이이와 성혼의 어짊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국가의 경장(更張)을 주장하고, 동서의 화합을 앞세웠던 그에게, 양사(兩司·사헌부, 사간원) 전원(全員)이 나서 그를 공격하는 상황에선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양사 관리들은 국왕이 공론을 무시하고 편파적으로 이이 편을 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이를 병조판서에 임명한 것은 비유컨대 태풍 전야에 나무 위로 올라가게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했는가? 선조에게 기회는 없었던가? 그 실마리는 불과 1년 전에 있었다. 1580년(선조 13년) 10월 호조판서에 임명된 이이는 경제사(經濟司)라는 임시 특별기구 설치를 제안했다(선조실록 14년 10월 16일). 세금제도와 인사행정 등에 대해 여러 개혁안이 나와도 국왕의 묵살과 신하들의 냉소적 태도 속에 묻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그가 개혁을 위한 일종의 긴급대응팀 구성을 제안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이는 경제사를 대신의 통솔하에 두되, 시무(時務)를 잘 알고 나랏일에 마음을 둔 인재들을 선별 후 임명케 해, 건의된 사항을 모두 그 관사에 내려서 상의 후 확정해 시행케 하자고 말했다. 세종이 나라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를 구한 뒤에 의정부와 육조의 관리로 구성된 도감(都監)에 내려 시행할 만한 조건을 갖춰 아뢰게 하는 방식을 재현하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이 제안에 대해 선조는 “경제사를 설치하면 나중에 반드시 큰일이 생길 것”이라면서 거절했다. “우리나라는 모든 공공의 일을 육부(六部·육조)로 나눠 관장케 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까닭이” 있지 않겠느냐는 게 선조의 반대 이유였다. 이에 실망한 이이는 왕께서 여러 신하에게 구언했지만 “어느 계책을 써서 어느 폐단을 구제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면서, 이래서 어느 천년에 대책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물러가 버렸다. 경제사 설치 제안은 비록 ‘일’로 진척되지 못하고 한낱 ‘말 잔치’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이가 생각하는 인재 쓰기의 조건을 담고 있다.

그것은 발탁한 인재로 하여금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게 하는 조건인바,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즉 변화의 명분과 함께(① 개혁의 정당성), 변화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형성해야 한다(② 지지세력 형성). 아울러 개혁을 주도하는 인물이 실권을 쥐고 조직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하며(③ 조직 장악력), 개혁의 대상이 되는 기득권층으로부터 개혁 주도 인물을 지켜내는 왕의 보호가 필요했다(④ 정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 이에 비춰볼 때 선조는 어느 하나도 갖춰 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총애하는 이이를 요직에 앉혀 정치적 바람막이로 사용하는 데 그쳤다.

이이 역시 그다지 현명하지 못했다. 그는 경연 석상에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을 만들지 못했다.

“율곡 목하(目下)에 온전히 남아나는 사람 없다”는 말에서 보듯이, 그는 어전회의에서 자기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신하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비록 다른 사람의 말에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그의 말을 충분히 경청하고 그중 쓸 만한 것을 살려냈던 ‘황희의 도량’이 이이에겐 없었다.

그렇다고 세종 시대 재상 ‘허조의 덕목’, 즉 공식 석상에서는 비판하더라도 그 사람의 경조사엔 꼭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하는 배려와 친함도 없었다. 왕 앞에서 상대방의 허점을 짚어서 좌절시키기만 하는 그를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조직을 장악하는 면에서도 이이는 부족했다. 이조의 “낭관(郎官)이 자기 부류들을 끌어들여 포치(布置)하여 이이를 공격하고 있다”는 김우옹의 지적처럼(선조실록 16년 7월 19일) 그는 조직 내부로부터도 공격받고 있었다. 십만 양병과 같은 혁신적인 정책을 제시할 때도 그 일의 필요성과 정당성만을 제시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입안하고 관철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없었다.

조정 내부에서 이이를 강하게 추천했고 당시 “여론을 진정시킬 만한 중망(重望)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던 유성룡이 경제사 설치에 대해 끝내 침묵한 것(선조실록 14년 10월 16일)이 그런 정황을 보여준다. “이이의 사람됨은 고매하고 글을 본 것 또한 많으나, 다만 함양(涵養)한 힘이 없어서 언론(言論)과 처사(處事)에 있어 경솔하다”는 유성룡의 평가는 핵심을 찌른 것이었다(선조실록 12년 6월 8일).

말하자면 이이는 나랏일을 보는 안목과 방략에서는 탁월했으나, 일을 맡아서 기획하고 추진한 다음 성과를 거둬야 하는 재상급 인재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보다는 그는 언관의 대표주자인 대사간으로 정책을 제안하거나 비평하는 역할을 맡거나, 그도 아니면 성균관 총장 격인 대사성의 위치에서 인재를 기르는 데 적합한 인재였다. 인재를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한 왕과 자신의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지 못한 인재가 만난 것이 우리 역사 최악의 인사 참사를 낳고 말았다.

세종리더십연구소장

글이 안 써지고 삶이 힘들어지면 늘 ‘세종실록’을 펼치는 사람. 1999년 서울대에서 ‘정조’로 박사 논문을 쓴 뒤, 2001년부터 정조가 제일 존경하는 인물 세종을 연구하기 시작. 46편의 세종 관련 논저를 냈고, ‘세종평전’ 출간을 앞두고 있다. 여주대 교수 겸 세종리더십연구소장.

■ 용어설명

한국적 소통 : 조선왕조실록에서 소통(疏通)이란 말은 ①말(지식)의 전달, ②인재의 적절한 배치 등을 뜻하는데, 이 중에서 ②의 용례가 중요하다. 정조(正祖)를 비롯한 전통 시대 사람들은 신분이나 학력 또는 과거의 죄과로 금고(禁錮)돼 있던 인재를 자리에 앉혀 일하게 하는 조처를 소통의 요체라고 했다(정조, ‘홍재전서’ 제30권). 뛰어난 인재가 제자리에 앉아 정책 제안을 하고, 그것을 일로 연결시킬 때 사람 마음에 맺힘(鬱結)이 없고, 나랏일에 막힘(積滯)이 없게 된다고 본 것이다. 말의 소통과 인재의 소통이란 관점에서 우리 역사 속 사례를 되짚어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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