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시작점인 수성동계곡을 품은 인왕산은 높지 않지만 깊고 웅장한 멋이 있다. 왼쪽 사진은 자락길에서 만난 길고양이.
청계천 시작점인 수성동계곡을 품은 인왕산은 높지 않지만 깊고 웅장한 멋이 있다. 왼쪽 사진은 자락길에서 만난 길고양이.

(8) 도심 속 인왕산

선홍빛 진달래 피는 봄부터
하얀 겨울까지 매력 발산

가파른 계단 올라 정상 오르면
성곽밖 풍경 빠져 걸음 느려져

등산객 오가는 곳 꽃길 가꾼
누군가의 지극 정성에 감동

청와대·경복궁 내려다 보여도
시선은 자꾸 나의 내면에 쏠려


편의점 앞에서 모르는 사람이 ‘투 플러스 원’으로 샀다며 건네는 아이스바를 얼결에 하나 받아들었다. 아직도 이런 인심이 있다니! 그걸 편히 먹을 수 있는 길로 들어섰다. 코스모스와 프렌치 메리골드가 많은 꽃길. 이 꽃길은 한 주민이 해마다 땡볕에서 지극정성으로 가꾼 결과이다. 그분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 매년 꽃의 종류와 양이 푹푹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이맘때면 이 길은 ‘코스모스길’로 불린다.

코스모스길의 중간쯤에서 누군가가 영어로 하는 말이 뒤에서 들린다. “저 여자는 여기 자주 오는데, 아주 나이스한 분…” 할 때만 해도 근처에 나이스한 여자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아주 따뜻한 분이고, 지난번엔…” 하는 말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다양한 피부색의 외국인들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혹시 지금 제 얘기를 하는 거예요?”라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덩치 큰 흑인 여성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짐작건대 그녀는 인왕산 아랫길에서 유기견 때문에 발이 묶였던 나를 본 듯했다.


주택가와 붙은 인왕산에는 버려진 개들이 많이 산다. 그 개들은 하나같이 개 도감에 나오는 버젓한 품종들이다. 버려진 개들끼리 짝짓기해 생긴 잡종들도 꽤 있다. 그렇게 번식한 개들이 네댓 마리씩 떼를 지어 밤낮없이 주택가로 몰려다닌다. 어느 새벽엔 정부종합청사와 광화문광장에서도 큰 개들이 어슬렁거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큰 개를 끌고 인왕산으로 올라갔던 남자가 허둥지둥 달려 내려오는 것을 본 적도 있는데, 올라갈 때와 달리 그는 혼자였다. 분명 산속에다 개를 버리고 내려왔을 것이다.

얼마 걷지 않아 나는 또 누군가의 인사를 등 뒤로 받는다. 에어비앤비의 ‘트립’이라는 관광상품을 운영하는 젊은 남자다. 그는 제대 뒤 직장을 구하지 못해 당분간 그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어쩌다 만난 몇몇 외국인에게 나 역시 인왕산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곤 했기에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잘 통했다. 불쑥 “인왕산에서 복무했나요?”라고 묻자, 그는 “용산에서 했어요. 인왕산에서 군생활했으면, 여기 안 오죠”라고 명쾌하게 대답한다.

정상까지 갔다가 청운동으로 내려갈 거라는 그에게 영향받아 오늘은 나도 마음먹고 정상으로 향한다. 화강암으로 뒤덮인 인왕산의 높이는 339.9m지만, 웅장하고 깊다. 직접 정상에 올라보지 않고는 해발이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을 수식하는 ‘웅장하고 깊다’는 말이 허풍스럽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니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올라보라. 깨끗한 바위틈으로 선홍빛 진달래가 피는 봄부터 시야가 시원해지는 겨울까지 인왕산의 매력은 무수하다.

정상을 향한 가파른 계단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선을 잡는 성곽 밖 풍경에 걸음이 느려진다. 두 개의 바위가 신비롭게 솟은 그곳에서는 빨리 와 보라는 듯 일정한 간격으로 징소리가 들린다. 조선을 세운 태조는 성벽을 쌓을 때 국사당을 성벽 안에 두자는 무학대사의 의견에 반하는 정도전의 의견을 따랐다. 징소리는 정도전의 뜻에 따라 성벽 바깥에 위치하게 된 국사당 근처에서 무속인들이 내는 소리일 것이다.

인왕산 일대에는 수많은 역사가 축적돼 있다. 청계천의 시작점도 수성동계곡에 있다. 겸재의 풍경화에서 많이 본 바로 그 수성동계곡은 두 갈래의 자락길과 통하고 윗길에는 멋진 전망대가, 아랫길에는 출렁대는 구름다리가 있다. ‘노화,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의 저자에 의하면, 수성동계곡은 병의 치유력을 높이는 우주자기력이 아주 강한 장소 중 한 곳이라고 한다. 버드나무약수터 역시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에너지가 몸속에 차오르는 명소란다.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던 무렵, 인왕산의 군 초소가 모두 철거됐다. 24시간 등산이 가능한 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안전한 산이라 믿었던 인왕산에는 언제 어디서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에 전경과 군인들이 있었다. 대신 이제는 CCTV가 곳곳에 설치됐지만, 그런 시설물은 위험에 처한 자에게 즉각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되돌릴 수 없는 시점에서 생각해 보니 드문드문 있던 군 초소야말로 생생한 역사의 상징물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대로 보전하면서 사람들이 비를 피하는 장소로 이용해도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청와대와 경복궁, 한강 너머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인왕산에서는 시야가 한껏 넓어지지만, 이곳에 올 때마다 나의 시선은 늘 내면으로 향한다. 희로애락이라는 운명적 지도를 따라가는 자신의 내면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자의식. 그것을 알아차리기에 인왕산보다 좋은 장소는 없다. 이런 느낌을 가장 강하게 받는 장소는 국사당을 왼쪽에 놓고 오르는 가파른 계단길이다. 두 다리로 돌아가야 할 삶의 현장을 굳건히 딛고 있다는 잔잔한 전율 때문에 시선이 자꾸만 정상이 아닌 아래 도심으로 쏠린다.

다른 길이 있지만, 하산할 때도 올라갔던 그 길을 택한다. 머릿속 생각은 하산할 때 더욱 탄력을 받는다. 불안정한 나의 삶에 스승이 될 만한 위대한 인간은 애초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나 자신의 내면에 있을 것이고, 외부에서 그런 존재를 만날 수 있다면 복권 당첨을 능가하는 행운일 것이다.

문득, 아무런 보상 없이 모르는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다 해마다 꽃을 심고 가꾸는 사람의 내면이 궁금해진다.

시인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