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死경계 뛰어넘어 영원한 삶
아쉬움과 소망의 기쁨이 교차
국가와 法 정당성 연구에 헌신
비도덕적 국가권력 결국 쇠망
만고의 큰바위 얼굴 같은 은사님
제 마음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아
지난주 토요일 새벽, 은사 심재우 선생님이 87세를 일기로 영면하셨다. 지난 월요일 새벽 유가족과 친지 그리고 제자들이 올린 영결식을 뒤로하고 총총 강릉 선영의 장지로 떠나셨다. 고인의 첫 번째 제자가 된 나는 영결식에서 아쉬움과 소망의 기쁨이 복합된 심령 가운데 조사를 지어 올렸다. 그 조사의 일부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 ‘저녁은 의미와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는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이 시간 저희들은 선생님의 영전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어 영원한 삶의 모습으로 변환된 선생님의 모습을 잠잠히 우러르고 있습니다. 흰 돌에 새겨질 영원한 새 이름, 베드로라는 선생님의 세례명처럼, 만고의 큰 바위 얼굴 같은 당신의 모습은 결코 우리의 마음자리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비록 이제부터 침묵하는 반석과 같을지라도, 우리를 자녀처럼 가르치시고 길러주신 선생님의 말씀과 또한 보석처럼 빛나는 저작물, 그리고 학문과 진리에의 열정 및 잔잔한 인품의 향내를 우리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평소에 저희들은 선생님 곁에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의 음향을 배경으로 운명을 가로질러가는 베토벤의 위대한 삶의 이야기를 들을 때, 고1 때 6·25사변이 일어나자 학도병으로 입대해 3년간 전선을 누빈 후, 늦어 대학에 진학해 학문의 외길을 걸어오신 선생님의 치열했던 젊은 날의 삶의 이야기와 겹치는 인상을 받곤 했습니다. 또, 칸트의 초상이 걸린 벽면을 마주하고 칸트의 정신적 삶과 법철학을 강론하실 때 우리는 단순한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그분의 영혼과 서로 맞닿아 있는 선생님의 학문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은사였던 마이호퍼 교수의 학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 그분에 대한 외경심마저 감추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마음을 우리는 경이로움으로 대면하곤 했었습니다. 수년 전 고려대 법학 100년지 앞부분에 실을 축하의 글을 부탁드렸을 때, 선생님께서 글쓰기가 쉽지 않다는 말씀을 하신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지만, 건강이 회복되기만을 기대했던 저희들은 앞으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다시 들을 수 없다는 이 사실 앞에 가슴이 미어지는 아쉬움을 감출 길 없습니다.
선생님의 특별한 사랑과 학은을 입은 저는 2019년 7월 5일 자 문화일보의 ‘살며 생각하며’ 난에 올린 기고문에서 선생님과의 만남과 배움을 잠시 회상한 적이 있습니다. ‘젊은 날 한때 연좌제의 덫에 걸려 좌절감의 늪에 빠졌던 나를 지탱해 준 정신적 멘토이셨던 선생님,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학문의 숲길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친절히 안내하며 소망과 열정을 품도록 격려해주셨던 선생님의 따스한 손길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라드브루흐가 독일 위인전에 수록된 그의 스승 프란츠 폰 리스트 편을 집필하면서, 나의 잊을 수 없는 은사라고 지칭한 말은 내가 심재우 선생님께 올려드리기에 가장 합당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께서 떠나셔야 할 시간이 아쉽게도 눈앞에 다가온 것 같아, 하이데거가 서양, 곧 저녁나라(Abendland)의 시인이라 불렸던 게오르크 트라클의 시편 일부를 선생님께 올려드리고 싶습니다. ‘비탄의 시각/ 더욱 침묵에 젖어들어 태양을 본다/ 영혼은 지상에서는 낯선 나그네/ 가지 친 숲 위로 푸른 하늘은 신비스럽게 노을져 가고… 평화로운 장례행렬/ 고인의 하얀 노래 위에 향연이 조용히 피어오른다.’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면서 온갖 수고와 기쁨과 슬픔을 맛보셨겠지만, 그 육신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영혼의 봄을 맞이하러 떠나시는 선생님을 저희 제자들도 경건한 마음으로 이제 고이 보내 드리고자 합니다.”
심 선생님은 일생 동안 형법학과 법철학에서 인간의 존엄성의 의미를 천착하신 분이시다. 그가 1973년 독일 빌레펠트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이 ‘저항권과 인간의 존엄’이었다. 그는 국가와 법의 존재 이유를 인간의 조건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봤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과 국가의 도덕성을 헌법상 최고의 법익, 법 가치로 간주했다. 그래서 현대의 법치국가는 그 본질상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에 의해 정당화된다고도 했다. 이 법 가치의 실현에 의무 지워져 있는 법치국가는 어떤 경우에도 비인도적이고, 비인간적인 지배 단체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이에서 벗어난 비도덕적인 국가권력에 대해 국민은 저항할 헌법적 권리를 갖고 있고, 시민은 국가권력에 불복종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저항과 불복종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법은 국가 정치권력의 최정상에도 좌면우고할 것 없이 적용돼야 한다. 국민의 현명한 눈을 얕보는 멍청한 권력은 부패와 부도덕에 빠져 쇠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생명 복음의 광채를 선생님 앞에 입증해 올리느라 애를 쓴 적이 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나도 자네처럼 믿음 위에 섰으면 좋겠는데,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안타깝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마침내 때가 이르매 선생님은 수년 전 사모님의 간절한 권면에 사랑의 마음으로 화답해 교리학습을 마치시고 세례까지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요하고 평안하게 천부의 품에 안기셨다는 것이다. 진실로 그 소식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내게 다가왔다. 때가 돼 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날, 그 아름다운 천국에서 거기 계신 선생님의 참모습을 뵐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하늘의 위로가 나의 허전한 마음을 채우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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