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빈 형! 형이 떠난 지도 벌써 1년 2개월이 지났네.
실향민 가족이었던 만큼 형제끼리의 정이 남달리 끈끈했기에 형의 부재가 남은 가족들에게 얼마나 상실감을 안겨줬는지 모르지? 형도 잘 알잖아. 모두가 우리 가족애를 부러워했던 것을.
멋진 조각가였던 형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어. 플루트·클라리넷·기타 등 악기도 잘 다루고 노래까지 잘 불렀던 형은 그야말로 로맨티시스트였지. 동생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또 부모님께는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자 형제들에게는 너무나 좋은 동생, 형, 오빠였어. 까칠한 동생에게 단 한 번 화를 내지 않을 정도로 호인이기도 했고.
난 타인들에 대해 형이 분노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때로는 형의 이러한 ‘식물성’이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어.
북녘에 두고 온 가족 때문에 내내 힘들어하셨던 아버지의 감성을 이어받았을까 아니면 현실과 맞닥뜨릴 땐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예술의 속성을 일찍 깨달았기 때문일까? 형은 천상 아티스트였고, 그러기에 늘 세상의 악다구니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느낌이었어. 분단의 비극이 형에게 내면화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형이 만든 강렬한 작품 하나를 내가 기억해.
절벽 양쪽에서 영원히 만나지 못할 남녀가 서로를 망연자실 바라보는… 형을 통해서는 슬픔이 항상 서정적으로 표출되는 느낌이었어. 아버지가 힘들 때마다 부르시던 ‘황성옛터’ 노래의 감성과 하나였을 거라는 생각이야.
형과의 추억은 일일이 다 거론하기도 힘들지만, 그중에서도 어릴 때 동생을 괴롭힌 기억은 아직도 생생해. 돈 10원을 줄 테니 실을 코로 넣어 입으로 빼보라는 둥, 10원을 줄 테니 1분 안에 트림을 100번 해보라는 둥… 형의 요구를 우직하게 받아들인 동생도 미련했지만, 형은 이런 식으로 동생 놀리기를 아주 재미있어했지.
누나와 일부러 잠꼬대하는 척하며 아버님에게 야밤에 바나나를 사 오시게 했던 기억도 떠올라. 지나고 보면 하나하나가 소중한 추억이야.
함께 만들어갈 추억이 아직도 많은데, 형이 너무 일찍 떠났기에 형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더 절절한 것 같아. 형, 무척 보고 싶다.
동생 이상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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