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두차례 매치플레이 격돌
하겐 모두 이겨 상금 절반 기부
나머지 금장 커프스 사 존스 선물


20세기 초반 골프의 두 전설이 한 세대를 함께하고 있었다. 1892년에 태어난 월터 하겐과 1902년생의 보비 존스였다. 미국 최초의 프로골퍼였던 하겐은 ‘흙수저’였다. 돈이 걸리지 않은 경기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올백의 머리에 시가를 문 채 7부바지와 흑백 투톤의 수제골프화를 신고 골프장에 나타나 거드름을 피우곤 했다. 반면 존스는 미국 조지아의 부유한 변호사 집안 출신으로 조지아공대와 하버드법대를 나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금수저’였다. 은퇴할 때까지 아마추어 정신을 고집했고, 매너가 넘치는 신사였다.

둘은 결국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팬들도 둘의 대결을 원했다. 존경받는 골퍼라는 수식어를 간절히 원했던 하겐은 “프로만이 진정한 골퍼”라면서 기세등등했다. 존스를 물리치면 자신이 최고임을 입증할 수 있을 터였다. 존스 또한 자신보다 위대한 골퍼는 용납할 수 없었다. 하겐을 이기면 최고 중의 최고라는 명성을 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6년 2월 28일 플로리다의 화이트 필드 골프장. 세기의 대결은 오전과 오후 각각 18홀씩 36홀 매치플레이로 열렸다. 하겐의 첫 홀 드라이버 샷이 왼쪽 숲에 처박혔고 존스의 공은 페어웨이에 안착했다. 하겐은 당황하지 않고 바위틈에 박힌 공을 아이언으로 사뿐히 쳐내 그린 주변까지 보냈다. 버디 욕심이 났던 존스는 세컨드 샷을 그린 뒤로 보내는 실수 끝에 보기를 범했다. 하겐은 3온 1퍼트로 파세이브를 하며 첫 홀부터 리드를 잡았다. 하겐은 드라이버, 아이언 할 것 없이 상대방의 혼을 빼놓는 스윙을 구사했고 존스는 이에 말려들며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하겐은 상대를 교란하는 천부적 재질이 있었다. 결국 7홀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하겐이 이미 8홀 차나 앞서 승부가 결정됐다. 이튿날 신문기사는 ‘하겐은 69타를 쳤는데 존스는 담배만 69개비를 피웠다’면서 존스의 패배를 대서특필했다.

애초 두 경기를 치르기로 합의했기에 두 번째 대결은 일주일 뒤 같은 코스에서 열렸다. 패배를 만회하려는 존스는 다시 하겐에게 무참히 농락당했다. 2번 홀에서 존스가 파를 했을 때 하겐의 공은 홀에서 15m나 떨어졌지만, 그는 젊은 여성을 향해 ‘버디를 하겠다’는 의미로 윙크를 날렸고, 공은 그대로 홀로 들어갔다. 다음 홀에서 8m 거리의 퍼팅을 남겨둔 하겐은 먼저 버디에 성공한 존스에게 “내가 넣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라고 말을 건넸다. 존스는 퉁명스럽게 “당신이 넣는다면 버디로 비기는 홀이 되겠지”라고 대꾸했다. 하겐의 공은 자석처럼 홀로 빨려 들어갔다. 11홀을 남겨두고 12홀을 앞선 하겐의 완승이었다. 존스는 하겐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겐은 상금 1만 달러 중 절반을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의료기금으로 기부했고, 나머지 상금은 대결 전 공언한 대로 금장 커프스 버튼을 사 존스에게 선물로 줬다. 존스는 “커프스 버튼을 찰 때마다 패배의 쓰린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나를 두 번 죽이는 하겐의 숨은 뜻”이라고 말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존스는 4년 뒤 골프 역사상 유일한 그랜드슬램을 이룩하는 전설이 됐고, 하겐 역시 미국인 최초로 디오픈을 4차례 우승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하지만 1926년의 대결 이후 둘은 마주치지 않았다.

골프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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