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부터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도
주변인물서 벗어나 서사 주도
남성편향 소재 반복에 싫증
남녀 캐릭터 균형찾기 시도
“저를 아세요? 제가 왜 맘충이에요?”
영화 ‘82년생 김지영’ 속 지영(정유미)은 자신을 ‘맘충’(아이 엄마를 비하하는 표현)이라 부르는 이들에게 이렇게 일갈한다.
그의 이름은 딸도, 엄마도, 며느리도 아니다. 맘충은 더욱 아니다. 그의 이름은 김지영이다.
잃어버린 이름과 자아를 찾아가는 김지영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27일까지 관객 112만 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김지영처럼 자신의 이름을 찾고자 했던 이들이 개봉 나흘 만에 100만 명 이상 몰렸다는 의미다.
김춘수 시인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썼듯, 이처럼 평범한 여성들의 이름을 부르고, 이들의 이름이 타이틀이 되는 작품이 늘고 있다.
◇내 이름을 불러줘!
지영은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일을 그만둔 평범한 주부다. 누군가의 딸이자 누나였던 지영은 또 다른 누군가의 아내와 며느리를 거쳐 엄마가 됐다. 지극히 보편적인 삶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여성이기에 겪어야 하는 부당한 차별이 적잖다. 지영이 이를 극복하는 방법 역시 혁명적이지 않다. 경력단절녀라는 편견을 넘어 다시 일할 기회를 찾아 나서고, 남편은 육아 휴직을 고려할 정도로 아내를 배려하며 지영의 상처에 연고를 바른다. 그래서 이 영화가 그저 ‘남녀 대립’으로 치부되고, 젠더 이슈에 매몰되는 건 아쉽다. 그보다 돋보이는 대목은 지영과 그의 엄마, 즉 여성과 여성의 이야기다. 엄마가 딸을, 시간이 지나 엄마가 된 딸이 다시 그의 엄마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위로를 전한다.
이런 정서는 이달 초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이었던 영화 ‘윤희에게’에서도 읽힌다. 엄마 윤희(김희애)에게 온 편지를 몰래 본 딸 새봄(김소혜)은 지금껏 몰랐던 엄마의 비밀을 알게 된 후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우울하고 예민한 윤희와 밝고 담담한 새봄은 몹시 다르지만 정작 주변에서는 “딸이 엄마를 닮았다”고 말한다. ‘윤희에게’는 새봄 같았던 윤희가 변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더듬으며 어느 순간 ‘엄마’로 살게 된 윤희에게 그의 이름 ‘윤희’를 되찾을 기회를 부여한다.
KBS 2TV 수목극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공효진) 역시 세상의 편견에 부딪혔지만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필부필부다. 젊은 미혼모인 동백이 작은 어촌마을인 옹산에 터를 잡고 술집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동네가 뒤숭숭하다. 하지만 그의 진심에 마을 사람들도 점점 동화되고, 옹산을 떠나기로 했던 동백이 그곳에 눌러살기로 결심하면서 삶의 온도가 점차 달라진다.
이 여성들은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지만, 세상에 빚진 듯 살아왔다. 그렇다고 그런 세상을 뒤집을 만한 기운도 없다. 그러나 그들을 짓누르는 시선을 이겨내고, 제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주변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한다.
이처럼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찾고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건, 자아를 되찾는 동시에 삶의 의미를 찾는 길이다. ‘동백꽃 필 무렵’의 남자주인공 황용식(강하늘)이 “동백씨~”를 외칠 때마다 동백의 마음에 사랑이 샘솟고, 지영이 ‘엄마’ ‘아내’ ‘딸’이 아니라 “김지영”으로 불렸을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는 이유다.
◇왜 지금 ‘여성’이어야 하나?
최근 TV와 스크린에서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종방한 MBC 드라마 ‘봄이 오나 봄’의 주인공은 ‘보미’와 ‘봄’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여성이었고, 현재 방송 중인 SBS ‘시크릿 부티크’, tvN ‘청일전자 미쓰리’, KBS 1TV ‘여름아 부탁해’ 등도 여성 캐릭터가 극을 이끌어간다. 극장가에도 ‘걸캅스’ ‘벌새’ ‘미성년’ ‘항거:유관순 이야기’ 등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잇따르고 ‘엑시트’ ‘증인’ ‘기생충’ 등에서도 여성 캐릭터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한동안 드라마와 영화에서 여배우의 활용도는 낮았고, 새로운 얼굴이 수혈되지 않아 ‘여배우 기근현상’이라는 우려도 많았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여성, 여성성에 대한 감수성과 인식이 높아지고 이와 맞물려 여성 이야기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들의 속내를 심도 있게 다룬 작품 수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항상 새로운 이야기에 굶주린 제작자들의 합리적 선택이라는 분석도 있다. 남성 편향적인 소재가 반복되는 것에 지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제작자들이 여성의 이야기를 발굴한다는 것이다. 또 영화나 드라마를 소비할 때 여성들이 주도권을 쥐고 선택한다는 것도 최근 여성 이야기가 증가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미투(Me Too) 운동 이후 여성을 보다 주체적으로 표현하려는 각성이 생겼고, 각종 콘텐츠가 너무 남성 중심적으로 흐르는 것에 대한 반발도 컸다”며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 등장한 여성 중심 작품의 성과가 좋다면 향후 남녀 캐릭터를 균형 있게 다룬 콘텐츠가 장기적, 안정적으로 생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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