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수였던 호건·스니드 입대하자
1945년 한해 최다 11승 대기록
14년 프로생활 접고 농부로 귀향


1930년대 미국골프는 히커리 샤프트의 시대가 저물면서 스틸 샤프트로 교체되는 과도기였다. 이 시대에는 영웅 3명이 당시 프로골프 무대를 섭렵했다. 영국의 ‘위대한 삼총사’를 본떠 미국의 ‘삼총사’라 불렸다. 미국 골퍼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경(Sir)’ 칭호를 받은 바이런 넬슨(사진), 미국프로골프(PGA) 최다승 업적을 일군 샘 스니드, 그리고 현대골프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 호건. 여러 대회에서 승패를 주고받던 3명은 모두 1912년에 출생했다.

넬슨과 스니드의 명암이 엇갈린 사건은 1939년에 일어났다. 필라델피아 컨트리클럽의 스프링밀 코스에서 벌어진 US오픈이 격전지였다. 처음엔 같은 조에서 경기하지 않았다. 스니드는 2라운드까지 선두였다. 넬슨은 3일째에서야 겨우 공동 10위에 올랐다. 마지막 4라운드는 토요일 오후에 열렸다. 당시 US오픈은 3, 4라운드를 토요일 오전과 오후 36홀로 진행했다. 스니드보다 앞서 출발한 넬슨은 오후 4라운드에서 68타를 쳐 합계 284타로 마무리했다.

넬슨은 막판 분전으로 크레이그 우드, 대니 서트 등과 함께 공동 1위가 됐다. 하지만 뒤 조에 조니 뷸러와 스니드가 남아 있어 안심할 수 없었다. 파 5홀인 18홀을 남겨두고 스니드가 1타를 앞섰다. 본부석에 있던 넬슨은 스니드가 마지막 홀에서 보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파로 마무리해 우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귀엽고 동안인데다 키도 컸던 넬슨은 인기가 높았다. 그의 스윙은 현대골프로 넘어가는 20세기 스틸샤프트에 가장 적합하게 적응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백스윙과 다운스윙에서 강도가 세진 스틸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리드하는 왼팔을 곧게 펴고 하체를 단단하게 고정하는 스윙이 요구됐다. 넬슨은 이를 해냈고 전성기의 평균 타수는 68.33이었다. 텍사스주에서 캐디로 일하던 어린 시절 히커리와 스틸을 번갈아 사용하며 연습한 결과였다. 1932년 20세에 프로로 데뷔했던 그는 3년 뒤 첫 우승을 하면서 넬슨 시대의 막을 올렸다. 1937년 마스터스 우승을 포함해 승승장구했고 ‘경’ 칭호를 받으면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떠오르는 별이었던 그가 US오픈에서 우승권에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메이저대회 US오픈 우승은 절실했다.

스니드가 18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서자 갤러리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잠시 뒤 이변이 일어났다. 스니드는 1타 앞서던 상황이기에 차분히 파를 지켜도 우승 가능했다. 그러나 스니드는 3명과 동타라고 생각했다. 스니드는 버디를 하면 플레이오프에 가지 않고 우승할 수 있다고 여긴 것 같았다. 버디를 목표로 한 드라이버 샷이 잘 맞았고, 이어 2온을 노리고 우드를 잡았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공은 그린 앞 벙커에 빠졌다. 불행의 시작. 벙커에서 3번 만에 그린에 올렸고 스리 퍼팅을 해버렸다. 트리플 보기. 이 홀에서만 8타를 쳤다. 합계 10오버파로 내려앉아 넬슨 등에게 오히려 2타 뒤진 채 경기를 마쳤다. 다 잡은 우승을 순간적인 계산 착오로 어이없게 날려버렸다.

스니드의 착오로 행운을 잡은 넬슨은 플레이오프에서 경쟁자 둘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넬슨의 유일한 US오픈 우승. 이후 넬슨은 1944년 8승과 1945년 한 해 최다인 11승이라는 대기록을 남긴다.

넬슨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다. 반면 넬슨과 맞수였던 호건과 스니드는 입대했다. 넬슨의 대기록은 경쟁자 없이 우승한 것이라고 평가절하됐다. 하지만 그가 당대 최고의 골퍼였다는 건 분명하다. “우승 상금은 소 한 마리, 트랙터 한 대”라며 우승할 때마다 농담을 입에 담았던 넬슨은 14년간의 프로 생활을 접고 고향 텍사스의 농부로 돌아갔다. ‘바이런 넬슨 클래식’은 PGA투어에서 넬슨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대회다.

골프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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