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논설위원

“한국인들이 기억해야 할 미국인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항상 품고 지낼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 있습니다.” 지난 7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국립외교원에서 열린 고(故) 레인 에번스(1951∼2014) 전 미국 하원의원 동상 제막식에서 이태식 전 주미대사는 이렇게 운을 뗐다. 에번스 전 의원은 2007년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되기에 앞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외교 문제 이전에 여성인권유린 차원에서 접근했던 사람인데, 이 전 대사는 “한국 사람보다 더 위안부 문제를 가슴 아파하며 기억했던 분”이라고 덧붙였다.

에번스 전 의원은 1999년 미 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뒤 5차례에 걸쳐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의 집요한 노력 덕분에 위안부 결의안은 2006년 하원 외교위원회를 통과했고, 2007년 하원 본회의 벽까지 넘었다. 이때 그는 파킨슨병으로 이미 정계를 은퇴한 탓에 마이크 혼다 의원이 바통을 이어받아 통과 작업을 주도했다. 당시 워싱턴 현장에 있었던 이 전 대사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속편이듯 혼다 의원의 활동은 에번스 전 의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동상 제작은 에번스 전 의원의 동반자였던 서옥자 컬럼비아 칼리지 교수 주도로 제작됐다. 에번스 전 의원을 한·미 우호의 상징으로 기억하기 위해 추모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서 교수의 제안에 한·미의 지인들을 움직였고 첫 성과물로 동상 제막식이 열린 것이다. 추모위원회에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딕 더빈 상원의원 등도 참여했다. 특히 오바마 전 대통령은 “에번스 동상이 한국에 세워진 것에 감사한다”면서 “우리의 친구이자 약자의 영웅이었던 그를 늘 그리워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서 교수는 30일 제막 행사를 뒤늦게 공개하면서 “앞으로 에번스 전 의원의 뜻을 기리는 한·미 우호 사업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에번스 전 의원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더 많아지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문재인 정부는 그를 부각시키는 일조차 부담스러워 하고 동상 제막식도 비공개로 했다. 오는 11월 5일 에번스 전 의원 5주기를 맞아 워싱턴에선 추모회가 열린다고 한다. 이런 행사야말로 한·일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서도, 미국 내 지한파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