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수 고려대 명예교수·법학

옷깃 스치는 바람결·마른 낙엽
내면의 밝은 의식과 마주치는

사색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
어둠을 밝히고자 했던 촛불은

광장·거리에 넘쳐나고 있건만
왜 우리 마음은 더 음습해졌나


가을이 점점 깊어간다. 하늘은 순진무구한 아기 눈동자처럼 맑고 푸르다. 곱게 물든 나뭇잎이 천지를 고운 색깔로 물들이고 있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는 걸음걸이로 10여 분 걸린다. 그 길 어디쯤 느티나무공원이 있다. 옛 대학 교정이 자리를 옮기면서 단독주택들이 들어섰고, 그때 생긴 자투리땅에 오랜 세월 견뎌 온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줄지어 서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리라. 바쁜 일상 속에서도 그 거리를 지나다닐 때마다 새로운 계절을 만나고, 또 조석으로 변하는 느낌을 맛볼 수 있어서 좋다. 지금은 낙엽이 꽃비처럼 길 위에 내리고, 그 낙엽을 밟으며 이웃들과 그들의 반려견과도 자주 마주친다. 어쩌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낙엽들은 빗속에서 한층 더 밝은 빛을 내뿜는 듯 신기해 보인다.

빗속의 한 잎 낙엽이 이럴진대, 피조물은 나름대로 빛의 속성을 안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햇빛, 달빛 그리고 별빛과 교감하는 사물의 아름다움은 필시 그 속에 숨겨진 빛의 무게와 향기를 각각 본디부터 품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 알프스 산록의 노란 단풍과 미국 동북부에서 캐나다를 잇는 차도의 눈부신 낙엽과 설악산의 기묘한 가을 풍경을 나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잊지 못한다. 그뿐이랴. 20여 년 전 어느 가을날 남해안 광양에서 경주로 향하던 도중 잠깐 들렀던, 합천 해인사 깊은 삼림에서 본 단풍의 해맑은 빛도 내 고향 강릉 산하의 가을빛 짙은 향기만큼이나 고이 간직하고 싶은 인상 깊은 장면들이다.

내 고향 마을에는 감나무가 많다. 집집마다 마당 가엔 몇 그루 감나무가 우거져 있고, 밭 가에도 산기슭에도 감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가을이면 단풍과 함께 곱게 익은 감들이, 잎이 다 떨어진 뒤에도 은쟁반 같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광경은 화사한 봄꽃처럼 아름다웠다. 낙엽이 지고 난 뒤, 약간 처량해 보이는 열매의 아름다움은 그래서 가슴에 더 오롯하게 진실함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논밭에 누렇게 고개 숙이고 익어가는 곡식들을 볼 때마다 자연이 손수 우리 내면의 인격 빈자리에 써서 가르쳐 주는 향내 나는 잠언들과도 같았다. 잘 익을수록 더 깊이 고개 숙일 줄 아는 자연의 손길에서 철없는 어린아이도 겸손의 아름다움을 익힐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을 향기의 백미는 누가 뭐라 해도 마르고 떨어져 뿌리와 흙으로 돌아가는 천고불변의 여정일 것이다. 떡갈나무 한 잎이 그 푸르름의 절정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무대에서 내려와 새봄을 꿈꾸며 소리 없이 사라져 가는 모습은 아름다운 성인의 뒷모습처럼 성스럽지 아니한가. ‘죽은 자의 잊혀질 여정 위에 떡갈나무는 저리도 신비스럽구나’라고 노래한 어느 시 구절처럼 말이다. 나의 가을 노래도 거기서 그다지 멀지 않아 보인다. ‘고요한 강물에/만산홍엽 녹아들 제//물결 위에 햇살/금빛 조각이라 반짝이고//땅거미 지는 창공/기러기 홀로 처량한데//흐르는 세월은 절정에서/하강을 꿈꾸노라’.

사색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옷깃에 스치는 바람결, 무심결에 굴러가는 마른 낙엽 하나도 예사롭지 않게 우리 내면의 밝은 의식과 마주치기 쉬운 계절이기 때문이다. 오솔길이나 돌담길에서, 아니면 사람들과 비둘기들이 떼를 지어 노니는 광장에서도 우리는 마치 시인처럼 시가 우릴 부르는 소리에 민감히 깨어 있을 수 있는 계절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어 오늘의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처럼 향기 그윽한 가을이 왔어도 가을답지 않게 을씨년스럽게만 느껴짐은 웬 까닭일까. 아테네에서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노래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청록파 시인 조지훈 선생이 우리의 젊은 날 반정부 시위가 한창이던 교정에서 시인정치를 말씀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지금의 분위기는 그때와 비교하면 더욱더 음습하고 어두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둠을 밝히고자 했던 촛불은 광장과 거리에 넘쳐나건만, 왜 우리의 마음은 전날보다 더 강퍅해지고 무거운 어둠에 눌려 있는가. 광장의 전광 촛불로 인해 목가적인 어머니의 촛불을 빼앗기고 정서적인 떠돌이 신세가 된 내게 새롭게 다가온 것은 고향의 울창한 숲길을 밝혀주던 아버지의 호롱불이다. 그것은 기이하게도 최근 인근 느티나무공원에서 길 위에 쌓인 낙엽을 밟고 가는 어느 집 애완견을 바라보다가 떠오른 연상이었다. 그때 나는 문득 스스로를 개로 여기고, 내가 이해했던 낙엽의 의미를 찾아 몸소 실천한 견유학파의 아주 오래된 생각을 떠올리게 됐던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좌우 할 것 없이 얼마나 성장 신화에 매몰돼 살아왔던가. 물질주의와 맘모니즘에 정신과 영혼을 팔아버린 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잡식동물이 된 인간 군상을 우리는 권력을 쥔 사람들의 민낯을 통해 목도하고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아테네 거리를 대낮에 등불 하나 켜 들고 참된 사람 하나 찾아 나섰던 디오게네스의 그 등불이 던져주는 의미의 무게가 오늘 이 땅에 사는 우리를 왜 이리도 부끄럽게 만드는지. 스스로 개처럼 자신을 낮춰 권력에의 욕망에서 벗어나 참 자유로운 삶을 엮어간 그의 뒷모습이 얼마나 성스러운지고.

진실로 그러하다. 모든 죄의 근원은 탐욕이다.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 같은 탐욕이 타력에 떠밀려 인생을 추락시키는 원흉이다. 창조의 신을 모르면 자연의 이법에 순응하는 낙엽 하나 보면서라도 인격의 향내 나는 정직과 진실과 거룩함을 배워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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