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혁명으로 인한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빠른 변화는 인간의 환경 적응뿐만 아니라, 기업의 성패에도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줬다. 의사결정의 타이밍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말이다. 모토로라는 조개껍데기를 본떠 만든 세련된 디자인의 ‘스타택(StarTAC)’의 흥행으로 1990년대 중반까지 휴대전화기 시장 점유율의 절반을 차지했지만, 디지털 기술로 이동하고 있는 무선통신 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빠르게 추락했다. 반면, 존슨앤드존슨은 자사 제품인 타이레놀의 복용으로 인한 사망 사건 즉시 생산 제품 전량을 회수해 폐기하는 한편, 원인 분석을 위해 제조 공정을 포함한 많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등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소비자들의 신뢰를 회복했다. 빠른 의사결정으로 위기를 모면하며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최근 방송·통신 시장이 격변하고 있다. 특히 국내 유료방송은 포화된 시장과 정체된 매출성장률로 위기가 고조돼 있는 반면에, 유튜브와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Over the Top)의 공세 속에 위기를 맞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장 재편이 불가피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사업자들은 방송과 통신, 플랫폼과 콘텐츠 등 사업의 영역을 넘나드는 합종연횡을 시도하고 있다. 이미 2016년 통신사와 유료방송사인 SKT와 CJ헬로비전 간의 인수·합병(M&A)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M&A로 규모와 범위의 경쟁력을 갖춘 사업자로 변모하고, 플랫폼을 고도화해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도전은 경쟁 제한성만을 중심으로 시장을 좁게 해석한 공정거래위원회의 불허 결정으로 좌초됐다. 정부의 경직된 판단으로 변화의 중요한 타이밍을 놓친 국내 유료방송 사업자들에 M&A는 이제 확장전략이 아닌 생존조건으로 전락했다.
그사이 글로벌 미디어 산업은 대규모 M&A를 하며 기업의 규모를 키워 가고 있다. 미국의 케이블TV사인 컴캐스트는 영국의 위성방송 스카이를 인수하며 세계 3대 미디어 그룹으로 입지를 다졌고, 통신회사인 AT&T는 콘텐츠 기업인 타임워너를, 월트디즈니는 21세기폭스와 힘을 합치며 거대 미디어 복합체로 몸집을 불렸다.
그러나 국내 시장에선 글로벌 경쟁이 가능한 경쟁력 있는 플레이어들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한정된 파이를 두고 ‘땅따먹기’ 경쟁을 하던 사업자들은 넷플릭스나 디즈니와 같은 글로벌 공룡들에 국내 시장을 다 내주게 생겼다. 경쟁력을 키우기보다 경쟁 자체를 피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이제 기존의 비즈니스 공식으로는 생존조차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SKT와 CJ헬로비전의 M&A가 불허된 지 3년 만에 다시 한 번 유료방송 생태계 재편의 신호탄이 쏘아졌다. LG유플러스는 CJ헬로와, SKT는 티브로드와 손을 맞잡고자 정부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시도는 미디어 생태계가 가져올 변화의 신호탄에 불과하다. 글로벌 시장의 동향을 볼 때 향후 수평적·수직적 결합이 더욱 활성화돼야 국내 미디어 기업이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더는 글로벌 트렌드에 역행하는 결정을 내려선 안 된다. 이동통신사의 자본력과 케이블TV의 지역성이 시너지를 갖는다면 침체된 지역방송사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동시에 글로벌 경쟁력도 확보할 수 있다. 인수 조건을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이나 불필요한 규제를 만드는 데 좌고우면하면서 유료방송 시장 재편의 ‘골든타임’을 또다시 놓친다면 글로벌 무한경쟁의 시장에서 좌초될 위기에 놓인 미디어 산업을 구해내기 어려워진다. 그만큼 국내 방송산업은 절체절명의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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