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열 경제산업부 부장

얼마 전 86세 고령 뇌사자가 자신의 간(肝)을 기증하고 떠났다. 국내 장기 기증 사례로는 최고령의 기록을 세웠다. 심장, 간, 폐, 콩팥 등을 장기 기증 은행에 남기고 가는 문화가 어르신들 사이에서도 거부감 없이 자리 잡은 것이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며 고인의 온전한 시신 보존을 고집하던 풍토가 상전벽해의 변화를 맞은 셈이다. 현대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일반인의 인식도 합리적으로 바뀐 것이다.

약 두 달 전 4년마다 열리는 ‘뇌과학 올림픽’, 세계 뇌신경과학 총회(IRBO 2019)가 대구에서 열렸다. 전 세계 2만 명의 뇌과학자가 찾아와 뇌신경과학의 최전선을 소개해줬다. 동시에 뇌 기증 운동을 알리는 캠페인도 진행됐다. 뇌를 기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80%에 달하기 때문이다. 뇌는 다른 장기처럼 뇌사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몸에 이식돼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아니다. 치매, 간질, 조현병 등 뇌가 고장 나 생기는 질병을 연구하는 과학자에게 소중한 연구자원이 되는 것이다. 뇌는 인공지능 같은 컴퓨터 과학의 최전선과 결합해 가장 핫한 연구 주제가 돼 있다. 미국이 브레인 이니셔티브를 선언하고, 유럽연합(EU)은 인간 두뇌 프로젝트(HBP)에 힘을 모으고 있다. 뇌과학에서 뒤져서는 과학선진국, 경제 강국이 될 수 없다는 자각에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뇌 연구 환경이 매우 척박하다. 과학자들은 주로 쥐 등 동물 실험을 하다가 실제 사람의 뇌에 적용하려 할 때는 신원미상의 변사자 등 극히 제한된 뇌 샘플로 연구를 해왔다. 충분한 뇌 조직을 활용할 수 없어 어려움을 겪는 일도 많다. 2014년 설립된 뇌은행은 이 같은 고민의 산물이다. 현재 100명이 넘는 뇌와 혈액·뇌척수액 등 970건의 뇌 자원이 기증돼 있다. 뇌 기증 희망 등록자만 795명에 달한다. 아직 시체해부법에 묶여 있어 한계는 있다. 한국뇌연구원은 제도와 인식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뇌과학은 뇌신경생물, 뇌의약학, 뇌인지, 뇌공학의 4개 영역으로 나뉜다. 기억의 생성과 유지, 개인의 의사결정과 사회성, 충동·분노·욕구의 작동 과정 등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4대 학문이 활발하게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 최근 과학계의 발표 논문 중 뇌 기능을 다룬 비율이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과학의 최전선에 서 있기 때문이다. 뇌를 선점해야 미래를 잡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노벨상 선진국 일본은 선구적인 뇌은행을 보유하고 있다. 뇌도 다른 인체 장기처럼 기증할 수 있고, 기증 행위에는 인류복리 증진의 숭고한 목적이 담겨 있다는 것을 더 알려야 한다. 모쪼록 한국에서 세계 최고의 뇌 대회를 열었던 뒷심을 모아 뇌를 기증하는 새로운 사회문화도 형성됐으면 한다. 기증받는 뇌은행과 병원, 연구진도 과거 기증된 장기를 적출한 후 시신을 함부로 방치한 일부 나쁜 선례 때문에 유족이 후회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의를 갖춰야 한다. 처음엔 쉽지 않을 것이다. 신체의 다른 장기와 달리 뇌는 나의 정신이 담긴 곳, 즉 나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하지만 나의 심장이 다른 환자의 심장이 되듯, 내가 기증한 뇌가 다른 이의 아픈 뇌를 보듬는 사랑의 뇌가 된다고 생각할 순 없을까. 뇌는 분노보다 사랑에 더 활성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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