뤽상부르 공원의 의자는 들고 다닐 수 있는 의자로 어디서라도 공원의 정취를 즐길 수 있게 해 준다.  @Pinterest
뤽상부르 공원의 의자는 들고 다닐 수 있는 의자로 어디서라도 공원의 정취를 즐길 수 있게 해 준다. @Pinterest

■ 건축과 일상
(25) 뤽상부르 공원의 의자

1760년‘의자 임대업자’나타나→ 1923년 의회‘세나 의자’배치→ 2003년 새 ‘뤽상부르 의자’ 프랑스 문화 상징으로
의자가 놓인 모습이 그곳서 나눈 대화의 흔적…공간은 고정된 장소 아닌 사람과 환경 어우러진 산물


‘세 개의 의자’(One and Three Chairs)는 조지프 코수스의 대표적인 개념미술 작품이다. 가운데에는 실제의 의자가 있고, 왼쪽에는 그 의자를 찍은 사진 속의 의자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글로 표현된 의자의 사전적 정의가 전시돼 있다. 실제의 의자, 사진 속의 의자, 글로 적힌 의자. 이 세 가지가 의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미술 작품은 사물의 추상적인 모습을 표현할 수는 있어도, 의자가 만들어 내는 일상의 구체적인 공간은 결코 드러낼 수 없다.

어떤 공원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타나 자기 마음에 드는 곳에 의자를 들고 간다. 의자에 앉아 책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오후의 한때를 보내는 풍경이 사람 사는 모습이다. 그뿐인가? 사람들이 앉았다가 치우지 않은 채 떠나가 버린 공원 안의 빈 의자들은 여전히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나가 버린 시간의 잔상이 그 의자에 남아 있는 것이다. ‘세 개의 의자’ 작품에는 결코 이런 공간이 나타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의자라는 물체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커다란 공원에 나무들과 함께 있는 의자, 거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빈 의자, 앉았던 사람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의자, 그들이 머물렀던 장소와 공간이 주는 행복감을 말하는 의자에 관한 이야기다. 의자라는 사물이 사람과 주변의 다른 것들과 함께 늘 새로운 공간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의자 하나가 주는 행복감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살자는 것이다.

파리를 나타내는 그림엽서에는 노트르담 대성당과 같은 역사적인 모뉴멘트만 있지 않다. 마로니에가 활짝 피어 있기도 하고 춤추듯이 낙엽이 떨어져 있기도 한 공원 사진이 참 많이 있다. 왜 그럴까? 그런데 이 장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공원 안의 의자들이다. 더구나 이 의자는 파리의 공원 말고도 길거리의 카페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특징이 없는 단순한 이 의자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의자가 된 것이다. 공원 안에 있는 이 의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파리시의 웹페이지에서도 이 의자를 팔고 있을 정도로 이 의자는 파리의 아이콘이 됐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은 1612년에 조성된 뤽상부르 공원(Jardin du Luxembourg)이다. 튀일리 공원(Jardin des Tuileries)에 이어 파리에서 두 번째로 큰 공원인데 면적이 23㏊나 된다. 공원 곳곳에는 이동식 의자가 놓여 있어 누구라도 원하는 곳에 가서 앉아 공원의 정취를 맘껏 즐길 수 있다. 뤽상부르 공원에는 유독 초록색 의자들이 아주 많이 놓여 있다. 의자가 공원 안의 여러 곳에, 그것도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이 의자는 파리시가 특별히 주문해 페르몹(Fermob)사가 만든 의자인데, 이름이 ‘뤽상부르’다. 알루미늄에 래커 칠을 했고 자외선에 강하고 외부에 계속 놓아도 괜찮은 전천후 의자이며 겹쳐 쌓아 올릴 수 있게 디자인했다.

이 의자는 어른이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워서 공원 안이라면 어디에나 좋아하는 곳에 들고 가서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 나무 아래나 분수 근처 등 자기가 좋아하는 장소에 자유롭게 이 초록색 의자를 들고 가 앉는다. 또 누군가 놓고 간 자리에 그냥 앉아 책을 읽기도 한다. 조금 싸늘하고 건조한 날씨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햇빛을 받으며 수다를 떨고 여유로이 오후의 한때를 보낸다. 넓은 공원에 혼자 앉으려고 멀리 가져가기도 하고, 두세 사람이 함께 가져가 원하는 방식으로 배치하기도 한다. 연못 근처로 의자를 들고 간 사람은 직사광선만이 아니라 수면에서 반사하는 빛으로도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이렇게 공원을 찾아가 의자를 제각기 사용하면서 유유자적하며 머무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다. 행복감이란 혼자 있는 고독에서 오지 않는다. 행복감은 자기만의 장소, 자기만의 시간, 자기만의 행동이 합쳐진 곳에서만 나온다.

자유로이 들고 옮길 수 있어서 앉았다가 그대로 놔두고 간 빈 의자에는 그 장소에서 나누던 대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의자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놓여 있으면 커플이 앉았다가 간 것이고, 나란히 놓여 있으면 노부부가 손잡고 앉았던 것이며, 마주한 세 개의 의자는 세 사람이 수다를 떨던 곳이고, 의자 여러 개가 원을 그리며 모여 있으면 여럿이 즐거운 대화를 나눈 것이다. 어딘가에 의자 한 개만 놓여 있으면 혼자만의 자유로운 시간, 고독한 시간을 즐겼다가 돌아간 것이다. 파리의 공원에는 이렇게 의자가 놓인 모습을 보고 이러저러한 공상을 할 수 있는 매력이 있다.

공원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자세는 무궁무진하다. 의자라고 하면 내 신체가 책상 앞에 앉기 위한 목적 하나만을 위한 도구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사람과 사물과 환경은 그렇게 있지 않다. 이 공원 속의 의자에서 보듯이, 자기가 원하는 환경을 찾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세, 동작 등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공간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생겨난다. 그리고 빈 의자는 앉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기록한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공간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위와 사물과 환경이 어우러져서 ‘생산된다’는 말이다.

빈 의자들은 앉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Regis Frasseto
빈 의자들은 앉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Regis Frasseto

공원이라면 당연히 고정된 의자를 둬야지 이렇게 의자를 마음대로 들고 다니면 누가 저 수많은 의자를 정리하며, 혹시라도 의자를 슬쩍 가지고 가면 그 책임은 누가 지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고정된 의자를 만들면 사람들은 그 자리에만 앉지만, 의자를 자유로이 들고 가 앉았다가 그대로 놔두게 하면 오히려 저 넓은 공원의 아름다움, 공원의 가치를 훨씬 더 많이 만끽하게 해 준다. 또한 의자를 이곳에서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큰 기쁨이기 때문에 가지고 가는 이는 아무도 없다. 관리는 행동을 규제하지만, 사용하는 공동의 기쁨은 공유하는 규범으로 바뀌는 법이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공원은 왜 만드는가? 관리하기 위해서인가, 시민의 기쁨을 위해서인가? 뤽상부르 공원의 의자는 시민의 기쁨을 생각한 것이고 공원 안에서 다양한 공간을 생산하게 해 준 매우 훌륭한 발명품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의자가 언제, 어떻게 공원 안에 놓이게 된 것일까? 18세기 초 파리 시민들은 시골길 걷기를 좋아했다. 이런 욕구를 만족시켜 주고자 공원에 고정된 벤치 대신에 따로 혼자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의자로 바꾸자는 생각이 나타났다. 시민의 기쁨이 먼저였고 의자는 그 수단이었다. 그러자 그 해결책으로 개인 사업체에서 의자를 빌려와 공원에 놓았다. 그러나 이 의자는 무료가 아니었다. 1760년 튀일리 공원의 관리인이었던 어떤 사람이 산책로 좌우에 수천 개의 의자를 늘어놓고 사용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런 공원에 가는 것 자체가 자기 신분을 나타냈으므로 돈 주고 의자를 빌리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뤽상부르 공원에는 ‘의자 할머니’라고 불라는 의자 임대업자도 점점 늘어갔다. 그 당시의 의자는 목제 의자였으나, 나폴레옹 3세의 제2 제정기(1852∼1870)에는 지금 파리의 공원에 있는 것과 거의 비슷한 철제 의자를 만들었다. 100년이 지난 후에도 의자가 시민에게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더 좋은 방법으로 지키고자 했다는 말이다.

뤽상부르 공원의 관리자이기도 한 프랑스 상원(세나·Senat)은 많은 사람이 ‘호주머니 돈’을 내며 정원에서 잠시 쉬는 것이 불편할 텐데도 불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상원은 의자 빌리는 값을 내리고 1년 정기사용권 제도를 만들었으며 의자 1500개를 구입해 시민에게 제공했다. 그 후에는 의자 임대 계약을 없앴고 1872년부터는 의자를 제조하는 권리를 공매하게 했다.

이윽고 1923년에 프랑스 상원의 의뢰를 받아 만든 ‘세나 의자’가 뤽상부르 공원에 나타났다. 이 의자를 제조한 곳은 론알프의 지방 옥외 가구 회사 페르몹이었다. 초록색 의자는 공원의 보도나 연못 주변에 마치 담쟁이덩굴처럼 퍼져 나갔다. 이런 의자가 노후해지자 1990년 프랑스 상원은 뤽상부르, 튀일리, 팔레 루아얄 공원에 세나 의자를 공급하는 제조사로 페르몹을 선정하고 2000개의 의자를 이 공원에 배치했다.

2003년 페르몹은 프레데릭 소피아 디자이너에게 뤽상부르 공원의 전설적인 의자를 재해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소피아는 1년 내내 이 시골 공원 의자를 세심하게 연구하면서 이것을 다시 디자인하기로 결정했다. 알루미늄으로 팔걸이와 곡면 등받이를 대고 가볍고 튼튼하며 편안한 의자, 게다가 겹쳐 쌓을 수 있게 다시 만들었는데, 그것이 ‘뤽상부르’라는 의자였다. 뤽상부르 의자는 본래 뤽상부르 공원용으로 만든 것이지만 이제는 파리의 여러 공원에서 무료로 사용하는 의자가 됐다. 그리고 프랑스 디자인과 문화를 상징하는 전설이 됐다. 여기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먼저 그들은 일찍이 공원을 만들었다. 1760년부터 그 공원을 개인이 의자를 들고 가 누구라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만의 장소를 찾아,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며, 자기만의 행동을 하며 행복감을 느끼라고 의회가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심지어는 제조 회사까지도 지정해 줬다. 모두가 이 의자와 공원을 함께 만들어 간 것이다.

공간이란 건축가나 조경가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제 몸을 이용해 환경에 반응하며 스스로 공간을 ‘생산할’ 수 있다. 뤽상부르 공원의 의자 이야기는 바로 이 사실을 말해 준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의 생산’(La production de l’espace·1974)에서 공간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반복해서 사용하는 누군가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생각은 저 먼 데 있지 않다. 이 공원의 의자 이야기가 바로 공간의 생산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주변에 공공공간이 적은 게 아니다. 오히려 그 공공공간을 사회적으로 사용할 줄 모르는 게 문제다. 근린공원은 있으나 아무도 안 오고 어린이 공원은 여기저기 있는데 어린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역과 터미널은 상업화하고 오히려 묘지가 공원화하고 있다. 물건을 사더라도 직접 상점에 가지 않고 현명하게 손해 보지 않고 정보만으로 물건을 사는 쇼핑 훈련을 하고 있다. 공간의 가치를 얻고 체험한다는 것은 언어를 획득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언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 속에서 쌓여가는 것이지 단기 강좌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뤽상부르 공원의 의자는 1760년부터 지금까지 260년 가까이 거의 매일 찾아가는 공원에서 수많은 사람이 몸으로 의자를 사용하고 배우며 만든 것이다. 건축도 이처럼 자기가 사는 사회 안에서 자기가 있을 곳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신체의 주변에 있어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사물과 장소와 공간을 건축물로 확장해 가는 것. 그것이 현대건축의 과제다.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 용어 설명

앙리 르페브르&‘공간의 생산’ : 앙리 르페브르(1901∼1991)는 60권이 넘는 방대한 양의 연구 성과를 남긴 프랑스의 사상가. 평생 소외이론과 국가 비판이라는 두 측면에서 마르크스 사상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청년기에는 당대 프랑스를 지배했던 베르그송 철학을 비판했고, 1960년대에는 알튀세와 인식론적 단절이론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의 명저인 ‘공간의 생산’ 역시 마르크스 사상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기획에 의해 탄생했다. 그는 책에서 “각각의 사회는 저마다의 공간을 생산한다”며 역사유물론에서 말하는 새로운 생산양식의 출현, 즉 기존 생산양식의 변혁은 생산 수단의 소유뿐만 아니라 기존의 공간 질서에 대한 전복과 새로운 공간 관계의 생산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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