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남산골 한옥마을. 제 빛깔을 잃어가는 숲속의 나무는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김호웅 기자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남산골 한옥마을. 제 빛깔을 잃어가는 숲속의 나무는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김호웅 기자

(10) 남산골 한옥마을

전통 가치관이 분열되는 세상
변치않는 가치관 만나고 싶어
식물도 인간도 자신 지탱해준
뿌리야말로 가장 핵심의 환경


한옥을 좋아하고 오래 살기도 했지만, 인위적으로 조성된 한옥마을에는 지금껏 가보지 않았다. 사십여 년 살아온 우리 동네만 해도 한옥이 많은데, 굳이 가볼 이유가 없었던 듯도 하다. 18년 가까이 살았던 나의 개가 내 곁에 있었을 때는 날마다 같이 근처 한옥 골목을 걸었다. 서울지방경찰청 바로 앞 내수동에 위치한 우리나라 제1호 한옥 골목이었다. 뒤늦게 기록을 남기기 위해 찾아오던 사람들과 심심찮게 마주쳤던 그 깊숙한 한옥 골목에는 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우리나라 한옥의 중요한 역사 중 일부가 사진으로만 남았다. 그 골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외국 여행객들은 북촌이 아닌 그곳을 누비고 다닐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연락이 온 한 친구와의 통화 끝에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만나자며 날을 잡은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새삼 깨닫는 것 중 하나는, 그리운 사람이라고 해서 자주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반대로 끌림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주 만나게 되는 사람도 있다. 사석에서의 만남이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은 개성 강한 사람들과 얽힌 관계 때문이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점조직으로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극찬했다는 책 ‘모스크바의 신사’의 주인공 남자가 점조직 사교의 대표적 예에 속할 듯하다. 그는 같이 만나는 사람들을 하나의 옷에 통일감 있게 달리는 단추로 비유했다.

지난 비에 잎을 거의 떨군 높은 나무로 옮겨 다니던 눈길이 검자줏빛을 띤 낮은 앵두나무에서 멎는다. 반가의 마당에는 앵두나무가 많다. 내 눈길을 의식한 친구가 앵두나무를 마주하고 서더니 심청가의 한 대목을 읊는다.

“이 진사 댁 작은 아가, 지난 오월 단옷날에 앵두 따고 놀던 일을 네가 행여 잊었느냐. 너희는 팔자 좋아 부모 모시고 잘 살아라. 나는 오늘 앞 못 보는 우리 부친 영 이별하고 죽으러 가는 길이로다.”

심청이가 죽으러 가는 길에 앵두나무 앞에서 머뭇거리며 하는 구절이다. 그걸 다 기억하는 친구가 놀랍다.

“심청가의 명언 중 하나잖아. 타인과 나의 기막힌 갈림길에 대한 원망이라곤 없던 그때 심청이는 열세 살이었어.”

“열세 살에 어쩜 그렇게 농숙했을까?”

“그뿐인가. 심청이가 장 승상 댁 부인에게 이런 얘기도 했잖아. 그게 전 세계 어떤 문학에도 없는 심청가 최고의 명언이야.”

“어디 한번 읊어봐.”

“장 승상 댁 부인이 그토록 예쁜 심청이가 죽으러 가는 걸 알고 공양미 삼백 석을 대신 내주고 수양딸로 삼아 아버지를 돌보도록 해주겠다고 했잖아. 그때 심청이가 이렇게 말했지. ‘고마우신 말씀, 죽어서도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그러나 앞 못 보는 아비 위해 효도를 할 양이면 제 몫으로 제가 해야지 어찌 남의 명분 없는 재물에….’”

“그러네! 어찌 열세 살짜리가!”

“심청이는 이미 열한 살에 바늘 하나를 구해 들고, ‘이제부터 공밥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지.”

“심청이도 대단하고, 읽은 자의 정독력도 기억력도 대단하네!”

타임캡슐 앞에서 우리는 침묵한 채 저마다의 생각에 잠긴다. 나는 효심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다가 인간의 기존 가치관이 분열되는 이 세상 어디에서 변하지 않을 가치관과 대면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또한 삶의 편린들을 땅에 묻어뒀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대면하고자 한 사람들이 좋은 환경 속의 사람일까, 척박한 환경 속의 사람일까 궁금해진다.

걸을 만큼 걸은 우리는 충무로역 근처에 있는 허름한 맛집으로 이동한다. 일본의 엄청난 핵폐기물 방류로 당장 식탁에 오르는 해산물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던 경고를 떠올리자 머릿속이 스산해진다. 그것도 잠깐. 김이 오르는 굴무밥과 가자미구이가 앞에 놓이자 얼른 수저를 잡게 된다.

우리는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하며 다시 한옥마을로 걸음을 옮긴다. 한옥마을의 울창한 나무가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밖을 본다. 환경이 좋은 곳에 있는 나무들은 마치 바이어스를 댄 것처럼 잎의 가장자리부터 곱게 물들기 시작한다. 고르지 않게 물들며 꼬글꼬글한 잎을 매단 나무들은 서 있는 곳의 환경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나뭇잎은 땅에 떨어져서도 어디가 아픈 듯 떼굴떼굴 구른다. 때가 되면 좋은 환경의 나무든 나쁜 환경의 나무든 자연의 섭리를 이기지 못한 채 잎을 떨군다. 식물도 인간도 자신이 가진 뿌리야말로 가장 핵심 환경이라는 사실이 새삼 자각된다.

남산골 한옥마을의 물소리는 높은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는 바람소리처럼 잔잔해지다가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도 한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해 필동을 거쳐 동국대 교정을 가로지른다. 캠퍼스 안에서 무려 네 명의 스님과 스친 뒤 평화롭게 햇볕을 쬐고 있는 길고양이들을 본다. 역시 불교재단인 학교에서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우리는 서로 반대 방향의 전철을 타고 쉽사리 헤어지지 못한다.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는 70년 전통의 제과점으로 들어가 작은 빵을 두 개씩 사고, 그 집의 명물인 모나카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들지만, 넓은 실내를 꽉 채운 사람들에게 놀라 텁텁한 공기를 탓하며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는다.

시인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