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의 실화를 다루고 있는 영화 ‘더 컨덕터’의 마지막 자막은 다음과 같다. ‘세계 50대 지휘자 중에 여성은 없다.’ 이 자막에서 드러나는 세계 지휘계의 유리천장이 한국인 김은선(39) 지휘자에 의해 통쾌하게 깨졌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오페라(SFO)는 최근 홈페이지를 통해 “김은선이 오페라단의 차기 음악감독으로 함께 일하게 됐다”고 밝혔다. SFO에 따르면, 김은선은 오는 2021년 8월부터 이 오페라단 음악감독으로 5년간 활동한다. 오페라단 총감독 매슈 실벅은 “김은선은 우리 악단에 독특한 에너지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모든 사려 깊은 리더십과 깊은 공감, 극장의 모든 이들을 향한 놀라운 존중으로 우리의 구성원들을 하나의 음악적 여정을 향해 하나로 연결했다”며 그의 지명 이유를 밝혔다. 김은선은 지난 6월 드보르자크의 오페라 ‘루살카’를 지휘하며 오페라단에 데뷔했는데, 6개월 만에 음악감독 자리에 오른 것이다.
SFO는 뉴욕메트로폴리탄오페라와 함께 북미에서 손꼽히는 오페라단이다. 김 지휘자는 1923년 설립된 이 오페라단의 네 번째 음악감독이자 첫 번째 여성 음악감독이다. 존 프리차드, 도널드 루니클스, 니콜라 루이조티가 전임 음악감독이었다.
김 지휘자는 임기 중에 오페라단의 100주년 시즌(2022~2023)을 맞게 된다. 매년 4개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야 한다. 이 밖에도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데뷔 무대가 예정되어 있고, 독일 본 베토벤 오케스트라, 파리 오케스트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등 여러 악단과의 공연이 잡혀 있다.
한국인이 세계 주요 오페라단의 음악감독을 맡는 것은 지휘자 정명훈에 이은 두 번째이며, 한국인 여성으로는 처음이다. 뉴욕타임스(NYT)는 김 지휘자가 “미국의 메이저 악단에서 음악감독직을 맡는 첫 여성이 될 것”이라며 “역사를 만들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 지휘자는 NYT에 “최초의 ‘여성 음악감독’이 된 것에 감사한다”면서도 “나는 다음 세대(여성 음악감독)는 그저 ‘지휘자’로 불리게 될 미래가 오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오페라의 첫 무대에 섰을 때 고향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며 “이 오페라단의 아주 다양한 측면에서 열린 협업, 진정한 프로페셔널의 연금술 같은 신기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샌프란시스코오페라의 가족이 되고, 이 놀라운 유산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게 돼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김 지휘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 당시 문화부 장관을 지낸 김성재 김대중평화센터 상임이사의 딸이다. 김 지휘자는 연합뉴스에 “제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저희를 항상 믿어주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줬고, 공부하라는 소리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또 “지휘자가 된 뒤로는 지휘자가 리더로서 많은 사람을 앞에 놓고 해야 하는 일인데 너무 작은 일, 소소한 일에 신경 쓰지 말고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등 아버지가 조언을 많이 해주셨다”고 전했다.
김 지휘자는 그동안 수많은 ‘최초’ 기록을 세워왔다. 연세대 작곡과를 거쳐, 독일 슈투트가르트 음대에 재학 중이던 2008년 스페인에서 열린 ‘헤수스 로페즈 코보스 국제오페라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2010년 스페인 마드리드 왕립오페라 극장에서 로시니의 희극 ‘랑스로 가는 여행’을 지휘함으로써 1858년 이사벨 여왕 2세 때 설립된 극장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지휘봉을 잡은 기록을 세웠다.
지난 2013년엔 한국인 최초로 영국 국립오페라단(ENO) 무대에 데뷔했다. 그는 당시 11차례에 걸쳐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 공연에서 지휘하며 세계무대에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는 2017년 미국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에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지휘하면서 미국 무대에 데뷔했다. 2년 만에 미국 메이저 오페라단 음악감독에 선임된 것인데, 세계 음악 거장들은 신뢰를 표시하며 앞다퉈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인 키릴 페트렌코는 “김은선은 지휘자로서 필요한 진지함을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치지 않는 노력과 적절한 자기비평적 접근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아온 동료다. 김은선의 음악감독 역임이 SFO에 뛰어난 개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라고 말했다. 김은선은 페트렌코가 프랑스 리옹 국립 오페라단의 지휘봉을 잡았을 당시인 2011년에 그의 보조 지휘자로 활동했다. 베를린 국립 오페라 무대를 통해 연을 맺은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또한 “김은선의 국제적 경력의 발전을 지켜보면서 항상 그가 지극한 엄격함으로 지휘자의 역할을 맡으며 그 무엇보다 그 책임을 성실히 이행하는 음악가라고 생각했다”면서 축전을 보내왔다.
장재선 선임기자
주요뉴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