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인물학
박현모의 한국형 소통이야기 - ④ 세종사후 고찰 : 문종의 패착
정책 제안 들어오면 일단 보류 ‘소통의 실패’… 세종 때 악평받은 인사를 요직배치 ‘인사 실패’
혼천의·간의 등 과학기구 방치된 채 사용법 전수 안되고, 척불 논쟁으로 재위기간 절반 이상 허비
그뿐 아니다. 세종 사후 87년이 지난 중종 32년(1537년)의 실록 기사는 각 분야 기능인들의 기예가 현저히 쇠퇴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세종시대에는 정치를 도모하는 일 외에도 백공의 기예라 할지라도 권하고 장려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모든 장인이 지극히 정교했었는데(百工技藝 極致精巧)” 그 당시에 이르면 통 그러지 못한다는 개탄이 그것이다(중종실록 32년 4월 13일). 음악 분야도 사정은 비슷했던 듯하다. “음악에 정통했던(知樂)” 서명응(1716∼1787)에 따르면 “우리나라 아악은 세종조에 제작된 이후 다시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징험할 만한 문헌이 없고, 실상에 대한 기술(記述)들이 소멸돼 성음 절주의 상세함을 말한 자가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서명응 ‘국조시악 序’, ‘홍재전서’ 제179권 군서표기).
백성들의 생활도 세종시대에 비해 크게 악화됐다. 예를 들어 백성들의 실질 소득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세금제도를 보면, 세종은 공법(貢法)을 도입해 토지의 비옥도와 기후 변화에 기초해 등급을 매기는 ‘전분6등 연분9등제’에 의해 소규모 자작농들의 이익을 보호했고 국가 세수도 증대시켰다. 또한 ‘농사직설 프로젝트’를 통해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됐으며, 합리적인 토지 개간법 마련으로 해안가와 북방 지역의 간척지를 대폭 늘렸다. 그 결과 고려 말부터 세종 중반기까지 50만 결이던 전결 수가 세종 14년(1432년)에 이르면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함경도(13만413결)와 평안도(30만8751결)는 중앙정부에 조세를 바치지 않고 재정을 국방 등을 위해 자체적으로 운용함- 전국의 6도를 합쳐 118만6070결에 이르렀다.
하지만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사정은 크게 달라진다. 소규모 자작농들의 이익이 침해되면서 농민들이 노비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국가 재정도 크게 악화됐다. 행정조직의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전세와 공납 유지가 제대로 안 됐고, 자의적인 세금 수취로 서민들의 삶이 크게 위축됐다는 연구 결과가 그것이다(Palais,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 산처럼, 2002, 102·111쪽). 다시 말해서 국가는 정치 공신이 대다수인 대지주의 농장과 새로 개간한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지 못했으며, 다수의 양인이 군역 회피를 위해 또는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대지주의 노비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국가 재정이 열악해지면서 국방 역시 소홀해졌다. 이웃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하고 신무기로 군사를 무장한 데 비해, 조선은 국방에 대한 무관심 속에 노비와 양반의 병역 면제로 인한 병력 수의 부족, 훈련 부족, 화기(火器) 도입 실패 등으로 국방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된 것이다. 1582년(선조 15년)에 이이가 제안했던 군제개혁안, 즉 서얼을 군역에 참여시키고, 변방 군사 복무 노비를 면천시키는 것, 그리고 10만 군사 양성 등의 제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21만여 명(육군 현역군인 16만여 명, 해군 5만여 명)에 이르는(세종실록 31년 8월 2일) 세종시대의 강군(强軍)이 형편없이 무기력한 군대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면 정치 분야는 어떤가? 정치는 앞의 모든 분야, 즉 과학기술이나 음악이나 경제 및 국방 분야보다 더 중요하다. “정치야말로 이들 여러 분야 중 으뜸가는 기술”인 바, “입법을 거쳐야만 다른 분야가 실행”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규정짓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Aristotle,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2장 179·180쪽). 정치 분야는 크게 ‘말의 소통’과 ‘인재의 소통’ 두 측면에서 살필 수 있다. 말과 인재의 소통은 세종이 가장 역점을 둬 실천했던 정치의 요체이고, “그의 치세 30여 년 동안 백성이 전쟁 없는 나라에서 안심하고 생업을 즐길 수 있었던” 비결이었기 때문이다(세종실록 32년 2월 22일).
실제로 세종은 ①어전회의 등에서 재상과 언관의 말을 경청하고 자유 토론하는(樂於討論) 수평적인 의사소통을 활성화시켰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②백성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는(問於農夫) 수직적인 말의 소통에도 적극적이었으며, 무엇보다 ③신분이 아니라 덕망과 재능을 우선해 인재를 발탁해서 ‘이 나라의 임금은 비록 세종이나 내가 곧 주인’이라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게 만든 인재 소통의 대가였다. 그러면 세종이 실천한 소통정치는 언제 어떤 계기를 통해 막히고 왜곡됐을까?
맨 처음 주목되는 것은 문종시대다. 문종(文宗, 1450∼1452)은 그동안 “학문을 좋아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아낀” 임금이었지만, 즉 수양대군과 같은 종친 세력이나 김종서 등 강신(强臣)에 둘러싸여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몽폐(蒙蔽)의 군주’로 평가받았다. 특히 부왕이 사망했을 때 지나치게 슬퍼해 건강을 잃고 39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한 안타까운 임금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문종은 세자 시절이던 1442년(세종 24년)에 첨사원(詹事院)이라는 섭정기관의 도움을 받아 국정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3년 후인 1445년부터는 실제로 신하들의 조회(朝會)를 받고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서무를 처결했다. 최소한 5년 이상 국정운영의 경험을 가진 셈이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후 그의 언행을 보면 과연 ‘안타깝게 단명한 훌륭한 군주’가 맞는지 의아해진다. 가령 그가 왕위에 오른(1450년 2월 22일) 직후에 한 조치인 대자암(大慈庵) 개축공사의 경우가 그렇다. 경기 고양시에 있는 대자암은 세종 왕비 소헌왕후의 기신재(忌晨齋)를 베푼 곳으로 문종은 이 절을 부왕 세종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로 삼고 여러 차례 법회를 열었다. 대자암 중창은 왕실 자체의 입장으로 보면 이해가 되나, 갓 즉위한 국왕이 최초로 한 조치로서 적절했나 하는 의구심을 일으킨다.
그 일은 연달아 들려오는 북방의 위기-몽골의 후예인 달달의 중국 침입과 황제의 긴급 이동-에 대처하는 일도 아니었으며, 민생에 관련된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로 해서 신하들과 척불 논쟁을 벌이며 재위 절반 이상을 보내고 만다.
그뿐 아니다. 즉위 후 첫 번째의 인사 단행 역시 문종의 정치적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든다. 1450년 7월에 그는 권맹손을 이조판서로, 이선을 공조판서로, 박호문을 중추원부사로 임명했다(문종실록 즉위년 7월 6일). 그런데 인사권을 쥔 권맹손은 뒤에 신숙주가 비판했듯이, 개인적 감정으로 인사 조치를 하고 왕을 기만하기까지 한 사람으로 비난받았다(문종실록 즉위년 11월 16일). 이선 역시 세종에 의해 “일을 맡겨서는 안 되는(不任以事)” 사람으로, 즉 공조처럼 인재를 지휘해서 성과를 내는 부서에 배치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문종실록 즉위년 7월 9일). 이견기나 박호문 역시 세종시대에 “비루한” 사람으로, 혹은 근거 없이 특정인을 “모함한” 사람으로 간주된 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중요한 자리에 전진시킨 것이 문종의 첫 번째 인사였다.
문종의 첫 번째 인사 중에 가장 큰 논란은 신미 대사에게 불교를 총괄하는 승직(僧職)을 내린 것이다. 영화 ‘나랏말싸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던 승려 신미에게 ‘나라를 도와 세상을 이롭게 한(祐國利世)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존호(尊號)를 왕이 직접 내린 일은, 아니나 다를까 이틀 뒤부터 큰 반대 상소에 부닥쳤다. 사헌부 장령 하위지의 취소 요청으로부터 시작해 사간원, 집현전, 성균관 유생들까지 들고 나섰다. 결국 신미 대사에 대한 존호를 고치는 수준에서 마무리됐으나, 이 일은 즉위 초반 문종 정부의 에너지를 ‘이념 논쟁’에 쏟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문종의 가장 큰 문제는 사안에 대해 결정짓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이었다. 그는 세자 시절 섭정할 때부터 ‘위에 아뢰겠다’고 해 모든 사안을 세종께 미루곤 했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그는 ‘다시 생각하겠다’고 말한 뒤에 일을 처리하지 않곤 했다. 왕이 신하들의 제안에 대해서 “그 전의 사례” 또는 “세종의 뜻”이라면서 뒤로 미루자 중요한 국정 사안들이 미결된 상태로 남게 됐다.
문종시대 전체를 총괄해 말한다면 인재의 소통 측면에서 사사로운 언행으로 세종에 의해 제외됐던 사람들이 요직에 진출했다. 말의 측면에서 본다면 하위 관료들의 제안과 수많은 상서(上書) 등으로 말은 대단히 풍성했으나, 책임지고 일을 마무리 짓는 재상급 인재들의 부재로 일은 성사되지 않는 불균형의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 용어설명
세종사후 130년 : 세종이 사망한 1450년부터 선조 재위 13년인 1580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 기간 일어난 몇 차례 중요한 정치쇼크로 인해 ‘세종치세’가 무너졌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세종치세는 세종 사후 신하들이 평가한 것처럼, ‘말(지식)의 소통’과 ‘인재(자리)의 소통’에 의해 이뤄졌다. 따라서 국정운영에서 말과 일이 네 차례의 정치쇼크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질되고 단절됐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네 차례 정치쇼크란 ①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이라는 찬탈정치 ②1498년(연산군 4년)과 1504년(연산군 10년)에 일어난 두 차례의 정변(보복정치) ③1519년(중종 19년)의 ‘기묘사화’로 인한 기대 좌절의 충격(배신정치) ④1575년(선조 8년)의 ‘을해분당(乙亥分黨)’이라는 당파정치를 가리킨다. 문종시대는 이러한 정치쇼크를 배태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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