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 전승훈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 전승훈 기자

■ 인지심리학

김민식의 과학으로 본 마음 - ④ 기억이란 무엇인가?

정보 ‘인출’하려면 일정표 같은 특정단서 있어야…방금 본 번호 되뇌다 전화 건 뒤 잊는 건 ‘단기기억’
우리말 구사·수영법 등은 무의식적으로 저장된 기억… 좋은 습관도 반복된‘암묵기억’


기억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기억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기억은 단일 체계인가 아니면 여러 종류의 기억이 있는가? 망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어떻게 하면 기억력을 잘 유지하고 향상 시킬 수 있을까? 좋지 않은 기억을 없앨 방법이 있을까?

인지심리학자들은 기억과 관련된 많은 질문을 해왔고, 지금도 과학적인 연구가 진행 중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기억은 흥미로운 관심 주제이다. 기억을 소재로 한 수많은 문학과 예술 작품들이 이를 증명한다.

기억이란 우리 마음의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정보처리 과정 중에서 주로 정보를 저장하고 인출하는 기능을 말한다. 우리에게 기억 능력이 사라진다면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여기저기 찾아 헤맬 것이고, 앞에 있는 사람이 친구인지 적인지도 알 수 없다. 어떤 일을 계획하는 일조차 무의미해진다.

기억이 왜 중요한지를 한마디로 말하면 기억이 없으면 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억은 배움을 통해 형성되는데 배운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변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변화는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는데 필수적이다. 산다는 것 자체가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이니, 배움을 통해 기억을 만들어 나가는 것 자체가 생존을 위한 것이 된다.

이제 일상의 기억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 당신은 오늘 아침 식사로 무엇을 먹었는가? 식사를 마치고 5분 이상 지났음에도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하고 있다면 식사와 관련된 정보는 당신의 ‘장기기억’ 창고에 저장돼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제 저녁 식사로 무엇을 먹었는가? 이 또한 대부분의 사람이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는데, 이 정보 역시 장기기억에 저장되어 있다가 인출된 결과이다. 그렇다면 일주일 전 혹은 한 달 전 저녁에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는가? 이 질문을 받고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날이 생일이거나 혹은 큰 행사 등이 있어서 기억할만한 날이 아니라면 더욱 어려워진다.

오늘 아침 식사 메뉴도 장기기억에 저장되고 한 달 전 저녁 메뉴도 장기기억에 저장된 것인데 왜 오늘 아침 식사는 쉽게 기억이 나고 한 달 전 저녁 메뉴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일까?

인지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어떤 일을 경험한 뒤 그 일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은 채 2∼3분 지난 후에도 그 일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일은 이미 장기기억에 저장된 것이라고 가정한다. 가령, 문화일보에 전화를 걸기 위해 검색을 해 보니 ‘02-3701-5114’인 것을 보고 번호를 머릿속에서 계속 되뇌며 휴대전화로 전화를 거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머릿속으로 되뇌며 잠시 동안 저장하고 있는 기억을 심리학자들은 ‘단기기억’이라고 부른다. 단기기억에 저장된 번호로 전화를 걸어 몇 분간 대화하고 전화를 끊고 나면 조금 전 전화 번호가 무엇인지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즉 그 전화 번호는 단기기억에만 있다가 결국 장기기억으로 넘어가지 못한 것이다.

어떤 정보가 장기기억으로 넘어갔는지 아닌지 여부는 몇 분 동안 다른 생각을 하고 나서도 그 정보를 기억해 낼 수 있는지를 보면 된다. 일단 장기기억에 저장된 정보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며칠 전 저녁에 무엇을 먹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니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되묻고 싶은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며칠 전 저녁에 먹은 것을 한두 시간 지난 그날 밤에 기억해 보라면 쉽게 기억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전에 식사한 내용이 모두 장기기억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면 며칠 전 먹은 저녁뿐 아니라 한 달 전 오늘, 일 년 전 오늘 먹은 것도 모두 기억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까?

일단 그 대답을 하기 전에 우리의 기억 과정을 간단하게라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기억 과정은 마치 우리가 은행에 돈을 맡겼다가 찾는 과정에 유추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은행에서는 우선 한화든 달러이든 ‘입금’하는 단계가 필요하고 그 이후에 ‘저장’하고, 마지막으로 ‘인출’하는 단계를 거친다. 마찬가지로, 기억과정에서도 들어오는 정보를 부호화(입금에 해당)하고, 저장하고 인출 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은행의 입금 단계에서, 한화 통장이라면 미국 달러나 중국 위안화가 들어와도 일단 한화로 바꾸어 입금하는 것처럼, 기억 과정의 ‘입금’ 단계는 본 것이든, 들은 것이든 기억 자료를 우선 ‘부호화’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가령 문화일보 전화 국번호 3701을 보고 외우려고 할 때 일반적으로 우리는 시각적인 모양 정보를 청각적인 부호(삼칠공일 소리)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이런 이유로 이 단계를 ‘부호화’ 단계라고 부른다. 사람 얼굴이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모양을 기억해야 하는 경우는 청각 부호화가 어렵기 때문에 시각 부호화를 사용하기도 한다. 혹은 앞서 3701 입력 정보에 대해 어떤 이는 ‘삼칠공일’이라는 단순한 청각부호에서 나아가 자신의 삼촌이 소유한 공이라고 생각하면서 ‘삼촌공일’이라는 의미적 부호화를 시도할 수도 있다.

이렇게 청각, 시각 혹은 의미 부호화된 정보들은 우리 기억에 저장되었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 인출되어 사용된다. (물론 불필요할 때도 저절로 자꾸 인출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가령 우리는 어떤 광고 노래의 일부가 하루 종일 떠올라 성가신 경험을 하기도 한다. 본인이 원하지도 않는데 어떤 기억이 자꾸 떠오르는 현상은 저장된 일련의 정보들이 자동적으로 인출되어 생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요한 메커니즘의 작동으로 인한 하나의 부작용(side effect)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만일 어떤 노래가 정 성가시고 짜증 나게 만든다면 다른 노래를 생각해서 경쟁을 일으키면 그 기억 속의 자동 재생이 좀 더 일찍 사라질 수 있다.)

부호화가 이뤄져 잘 저장되어 있는 기억정보라고 해도, 인출을 잘하지 못하면 기억해 낼 수 없게 된다. 일 주 전 오늘, 한 달 전 오늘 저녁에 먹었던 음식이 잘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장기기억 저장소에서 사라졌다기보다는 저장되어 있는 정보를 제대로 인출 해내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마치 은행에 저장된 예금을 인출 하기 위해서는 비밀번호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저장된 기억정보를 인출 하기 위해서도 그와 관련된 단서가 필요하다.

여러분이 대형 서점에서 ‘딱딱한 심리학’이라는 책을 구입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 책을 찾으려면 그 책이 보관된 구역과 책장 번호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책을 보다가 엉뚱한 곳에 놓아두었다면, 분명 그 책이 서점에는 있지만 그 책을 찾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비록 장기기억에 저장된 기억 정보라고 해도 그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인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만일 한 달 전 오늘 내 일정표를 보니 친한 친구 생일이었고 그 날 저녁 식사를 위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날 친구와 무엇을 먹었는지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의 단서가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기기억의 망각은 대부분 인출 실패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을 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단서를 이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또한 부호화 시(처음 기억을 할 때), 단순한 청각 부호화보다 의미 부호화를 하는 것이 보다 깊은 기억 흔적을 남길 수 있고 따라서 인출도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기억은 어제 누구를 만났고, 어떤 뉴스가 있었고, 외웠던 영어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등 대부분 자신이 의식적으로 경험한 사건들과 관련된 기억이다. 이러한 기억을 인지심리학자들은 일화 기억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 우리 몸이 노화되는 것처럼 이 같은 우리의 일화 기억력도 서서히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며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같은 의식적인 기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이를 먹어도 별로 그 기능이 떨어지지 않고, 우리 생존에 큰 영향을 주는 매우 중요한 또 다른 기억 시스템이 있다.

의식적으로 기억해낼 수는 없지만 우리 뇌에 저장되어 사용되는 것으로 암묵기억(혹은 절차기억)이라고 부르는 기억이 바로 그것이다. 의식적으로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기억에는 저장되어 사용되는 정보가 과연 무엇인지 일반인 입장에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특히 우리 모두가 이런 무의식적 기억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 의식할 수는 없다니 도대체 무슨 말일까?

우리는 어렸을 때 우리말을 배웠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도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자신의 의사를 우리말로 잘 표현하고 초등학생 정도면 대부분 문법에 맞는 우리말을 잘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한 번도 국어 문법에 대해 배운 적이 없고 문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잘 모르면서도 제대로 된 문법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즉 본인이 사용하는 언어에 내재해 있는 법칙(즉 문법)은 의식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그 법칙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의식적으로는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저장되어 사용되는 정보가 바로 암묵기억인 것이다. 운동기술 또한 대표적인 암묵기억 중 하나이다. 가령 수영하는 법을 배웠다면 그 운동 기술은 여러분이 의식적으로 접근 가능한 내용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저장되고 인출되어 사용되는 정보이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아무리 의식적으로 수영 교본을 공부하고 외워도 수영을 실제로 잘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수영을 잘하기 위해서는 연습하고 연습하고 연습하는 길밖에 없다.

습관, 이것도 대부분 암묵기억 영역에 속한다. 의식과 무관하게 저장되어 자동적으로 사용(인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번 습관이 형성되면 아무리 의식적으로 바꾸려 노력해도 잘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식과는 무관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좋은 습관을 저장하는 것이, 의식적으로 수학 공식, 영어 단어 하나 더 기억하는 것보다 우리 마음에, 우리 인생에 더 큰 영향을 끼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 용어설명

기억과 망각 : 저장된 정보를 제대로 인출해 내지 못하는, 이른바 ‘인출 실패’인 ‘망각’은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망각 때문에 덜 사용하고 덜 중요하고 때로는 괴로운 기억들에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을 수 있다. 망각의 장점이 있다.

기억과 착각 : 우리의 기억은 본 것을 그대로 저장하는 컴퓨터가 아니다. 입력하는 순간 보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보고, 변형해서 보고, 기억하는 동안에도 순간순간 여러 주변 정보들에 의해 저장된 내용이 사라지거나 바뀌거나 심지어 없던 것이 새로 생기기도 한다. 기억은 일종의 주관적 경험으로 주관적 경험은 언제든 틀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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