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정세균 전 국회의장을 차기 국무총리에 지명하고 당사자가 수락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 대한민국 헌법 취지를 거스르는 헌정사의 오점이다. 더욱이 정 지명자는 아직 임기가 5개월 이상 남아 있는 제20대 국회의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냈고, 현역 의원이기도 하다. 헌법은 전체를 관통해 엄격한 3권분립을 규정하고, 입법부-행정부-사법부 순으로 배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전임자들은 국회의장이 되면 탈당하고, 의원 임기를 마치면 정계를 떠남으로써 이를 실천했다. 이번 지명과 수락은 3권분립의 경계를 허물고, 국회를 행정부의 하부 조직처럼 비치게 한다.

정 지명자는 모범적 의원에게 수여하는 백봉신사상을 사상 최다인 14번이나 받았을 정도로 역량과 인품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민주주의 대의(大義)는 이런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다. 또, 국회 활동을 잘 했다면 그만큼 더 국회 권위를 실추시킬 일은 하지 않는 게 옳다.

원론을 넘어 각론에서도 문제가 심각하다. 지명 사유가 억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입법부 수장을 지내신 분을 모시는 데 주저함이 있었다”고 했다. 3권분립 훼손 우려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명하지 말았어야 했다. 대통령의 제1 책무가 ‘헌법 수호’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민생과 경제 성과’와 ‘통합과 화합’을 지명 이유로 제시했다. 그러나 위헌적 무리수까지 동원할 정도의 획기적 장점이 보이지 않는다. 쌍용그룹의 소규모 J계열사에서 일했고, 노무현 정부 후반기의 1년도 못 되는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정도의 경제 역량을 갖춘 사람은 수없이 많다. 정치적 내전이라고 할 정도의 국민 분열상은 문 대통령 ‘코드 국정’에 근본 원인이 있기 때문에 총리가 바뀐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친여 단체들 반대로 ‘경제 전문가’ 김진표 카드를 내버렸다는 점에서도 통합 주장은 자가당착이다.

어쨌든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국회의장의 총리행(行)이 되풀이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국회는 행정부의 ‘공식적 시녀’가 된다. 그래서 정의당도 ‘우려스러운 대목이 있다’고 했을 것이다. 국회는 초당적으로 거부함으로써 국회 위상과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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