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1960년대 여러 방송국 창설을 주관해 ‘한국 방송의 전설’로 불린 최창봉 선생께서 작고하신 지 3주기(12월 29일)가 다가옵니다. 지금, 한국 방송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을 바라보면 그 거장(巨匠)이 더없이 그리워집니다. 이 어두운 현실에서 다소라도 위로받기 위해 그의 빛나는 방송 생애를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선생은 6·25전쟁 참전 후 1954년 육군 중위로 국군방송 책임자가 됐으며, 전역 후인 1956년에는 HLKZ-TV(일명 종로텔레비) 개국에 참여해 한국 최초의 TV PD로 활약했습니다. 1961년에는 MBC 창설 방송책임자로 초빙됐다가, 5·16 군사정부가 KBS TV 개국 준비반장으로 징발했을 때 이를 완강히 거절하자, 방송 부처 장관은 “최창봉을 안 보내주면 문화방송 개국 허가를 안 해 준다”고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정부로서는 선생의 TV 제작 경험과 미국 방송 연수 경력(1957년), 그리고 그의 통 큰 리더십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군사정부가 당해인 1961년 내 KBS의 TV 방송 개시를 국민과 약속한 터라 서둘러 12월 31일에 오픈식을 했고, 그는 그 큰일을 치르고 얼마 뒤 관료들의 등쌀에 KBS를 뛰쳐나왔습니다.
선생은 1963년에 또 하나의 방송국을 창설했습니다. 동아일보사 부속 동아방송(DBS) 개국 책임자로 초빙돼 DBS를 무소불위(無所不爲) 선진 매체로 만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부의 독재화를 철저히 견제했던 보도(‘라디오 석간’ 등)를 비롯해 팝송PD를 DJ(‘3시의 다이얼’ 담당)로 파격 기용했고, 격조 있는 토크쇼(‘유쾌한 응접실’) 등을 개발해 천정부지의 인기 프로그램을 방송해 ‘작지만 큰 방송국’의 신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들어서 정부는 선생을 또다시 KBS 총책임자로 끌어가는데, 권력 앞에 어쩔 수 없었던 동아일보 사주 김상만은 송별 점심에서 “최 국장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국장 자리를 비워 둘 테니 출장 갔다 오시오”했지만, 그는 또 다른 사명감 때문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우선, 국영방송 KBS를 정도화(正道化)하는 일이었습니다. ‘정당토론회’ 프로그램을 만들어 야당 국회의원을 출연시켰다고 난리 법석일 때, 그는 ‘총리에게 듣는다’ 를 편성해 정부 여당을 입막음했습니다.
순수 방송인인 그에게는 더 큰 과제가 있었는데, KBS 국영방송을 공영화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방송관리국장이던 노정팔과 KBS를 공사화하는 데 앞장서 발기인으로 1973년 3월 3일 한국방송공사를 출범시켰습니다. 선생은 그 후 1989년 MBC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당시는 방송사에 노조가 설립돼 극성스러울 때였는데, 선생은 나를 만날 때마다 방송 사료를 넘겨주며 체험담을 전수하는 한편, 가끔 사장으로서의 고뇌를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언젠가는 MBC 노조에서 “사장은 경영만 하고 방송에 간여하지 마라”고 윽박질렀지만 그는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고 “방송사는 방송 빼고는 경영할 게 없다”며 꼿꼿하게 대처했습니다.
당신의 결혼식에 주례를 서셨던 은사 조지훈 시인이 주례 시(詩)에서 “푸른 하늘로 푸른 하늘로 항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 같이 그 속에서 높은 넋을 살게 하라” 하신 대로, 하늘나라에서도 그렇게 사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김성호 방송역사학자·전 광운대 교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립습니다’사연, 이렇게 보내주세요
△ 이메일 : phs2000@munhwa.com
△ 카카오톡 : 채팅창에서 ‘돋보기’ 클릭 후 ‘문화일보’를 검색. 이후 ‘채팅하기’를 눌러 사연 전송
△ QR코드 : 독자면 QR코드를 찍으면 문화일보 카카오톡 창으로 자동 연결
△ 전화 : 02-3701-5261
주요뉴스
시리즈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