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준연동 비례제 문제 너무 심각
主權在民 흔들고 정당은 퇴행
이익집단型 정치로 공익 실종

이제 유권자가 각성해야 할 때
전략적 판단으로 엄중한 심판
정치사엔 전화위복 사례 많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기괴한 선거제도가 현실로 다가왔다. 반대 측은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고 헌법소원을 제기해 그 실행을 막겠다고 하나, 제도는 일단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며 통과된 상태다. 이 제도는 당위적 원칙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고, 우리 정치를 야바위판처럼 흔들 가능성이 커 큰 우려를 자아낸다. 그러나 울고만 있을 순 없다. 혹시 이 제도가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역설은 없을지 애써 전화위복의 여지를 찾거나 만들 필요가 있다.

물론, 희망을 품기엔 이 제도의 문제가 너무 크다. 우선, 정치 구도를 철저히 정당 대결로 치환시키고 유권자를 정당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많은 유권자가 기존 정당들에 환멸을 느껴 무소속 후보에게 표를 줘도 결국 국회 의석은 정당투표 용지상 어느 정당이 몇 표 받았는지에 결정적 영향을 받아 정해진다. 정당투표가 현행 선거제도에선 비례대표 47석만 결정하지만, 연동형에선 전체 의석을 좌우한다. 옹호론자는 “비례성과 대표성을 높인다”고 선전하지만, 정확히는 이 말 앞에 ‘정당의’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각 당의 득표수와 의석수 간 비례성을 높여 각 당의 대표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정당 친화적, 정당 중심적 제도로서 가히 ‘정당에 의한, 정당을 위한, 정당의 국회’를 등장시킨다고 할 수 있다.

이 제도로 유권자는 더욱더 피동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되고,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당위적 원칙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정당체제가 국민의 일상생활에 잘 스며들고 오랜 전통으로 확립돼온 일부 유럽국가와 우리나라는 다르다. 국민의 의식이나 삶, 사회 전통과 별 연관도 없는 ‘엘리트’ 정당, 진성 당원이 거의 없는 ‘그들만의’ 정당, 수시로 합종연횡하며 변해 실체마저 파악하기 힘든 ‘아메바’ 정당, 선거철이면 생겼다 없어지는 ‘인스턴트’ 정당이 우리의 현실이다. 국민적 불신 대상인 이 정당들이 선거 및 의정의 중앙을 독차지할 때 유권자 중심의 민주주의는 공허한 수사에 그치고 만다.

극단적 정당 중심주의로 가도 만약 정당이 순기능을 발휘한다면 좀 나을지 모른다. 그러나 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선 정당이 지엽적 이익집단으로 전락하기 쉽다. 정당투표로 의석이 결정되는 판이니 각 정당은 평균적 국민을 쳐다보며 공동선을 지향하기보다는 이념이나 지역에서 강한 색깔을 내며 특정 지지 기반을 공고화하는 전략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정당으로선 특정 이익을 대변하는 투입(input) 기능만 중시하고 공익 추구의 국정 거버넌스를 위한 산출(output) 기능은 무시하게 된다. 이미 시민사회가 양극적 틀 속에서 기성 정당들에 대폭 흡수돼 양자 간 구분이 흐려진 상황인데, 새 선거제도는 그 현상을 심화시킬 것이다.

이익집단처럼 구는 정당들로는 안정된 국정 운영을 기대할 수 없다. 중도 수렴의 구심력보다는 각종 지엽적·극단적 이익을 향한 원심력이 강해진다. 국정 운영은 정치 풍향에 따라 정당들의 불안한 연대나 단기적 거래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연속되는 이합집산, 임기응변으로 국정 운영은 누더기가 돼 통합성·지속성·예측성·책임성 등의 가치도 빈말이 될 것이다. 온갖 정파적 꼼수와 편법이 난무하며 국민은 불신과 환멸의 늪에 묻힌다. 양당 구도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다당 구도에서 답을 찾는다면 오산이다. 중남미의 나쁜 선례를 따르게 될 뿐이다.

이제 우리 정치의 앞날은 암담하기만 할까? 새 선거제도는 암운을 드리우나, 역사는 전화위복의 사례로 가득 차 있다. 부실하거나 잘못된 제도가 역설적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워 종국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희망컨대, 우리 유권자가 기괴한 제도에 현혹되지 말고 공동선 지향의 시민의식을 되살릴 수 있다면 고도의 전략적 판단으로 국정 운영을 살리는 쪽으로 투표하고 그러한 취지의 사회 담론을 형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전략적 유권자는 제도보다 똑똑할 수 있다. 또는, 야바위판과 같은 의원선거와 국회에 충격을 받은 유권자가 중장기적으로 대선 등에서 시민의식을 발현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를 기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재로썬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이러한 역설적 상황을 찾지(아니, 만들지) 않으면 안 될 위기 국면에 빠져 있다. ‘이 없으면 잇몸’이듯 정치권이 어리석으면 유권자가 똑똑해지는 수밖에 없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