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인물학
박현모의 한국형 소통이야기 - ⑤ 나라 망친 단종시대 사람들
계유정난 등 정변의 시대… 권력서 밀리면 관직·재산·신분마저 바뀌던 ‘생존도박의 정치’
사육신·생육신 등 특출난 인재들 ‘권력다툼 희생양’으로… 세조 이후에도 격화일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그것을 그때 그 사람들은 왜 못 보았을까?’
문제는 왕을 보필하는 신하들에게 있었다. 단종 정부의 인사를 보면 정치가 ‘굉장히 좋은 직업’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인사권을 쥔 재상들은 합격자 수를 늘리면서까지 아들과 사위를 합격시키는가 하면(단종실록 1/4/15) 자기 아들을 “일 년에 5단계나 승진”시키고(황보인) 자격 미달의 아들을 천거하는(김종서) 등 낯 뜨거운 일들을 서슴지 않았다. 세종이 중시했던 인사의 상피(相避) 원칙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원칙론자 허후까지도 “내 힘으로는 사사로운 인사 관행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무기력을 호소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그놈이 그놈이구나. 온 조정이 대신들 자제로 가득 찼다”고 개탄했을까(단종실록 1/6/8).
이 점은 계유정난(癸酉靖難), 즉 단종 재위 1년째인 1453년 10월 수양대군이 일으킨 궁중 쿠데타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새로 집권한 정난공신들은 마치 전리품 챙기듯이 자기 세력을 정부 요직에 앉혔으며, 패몰한 정적들의 집과 땅을 빼앗아 나눠 가졌다(단종실록 1/10/15; 1/12/2). 가족에게 행해지던 인사 특혜가 공신으로 표현된 지지세력에게로 옮겨갔을 뿐이었다. 어디에도 세종이 중시한 인재의 기준, 즉 공공심과 청렴도, 그리고 일처리 능력(세종실록 20/3/12)을 반영한 인사는 없었다.
그런데 황보인과 김종서가 누구인가? 그들은 세종시대에 북방 경계선에 성을 쌓는 공사와 사민입거(徙民入居·백성 이주) 등 국가적으로 필요한 일을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추진한 인재들이었다. “큰일을 이루려 할 때 처음에는 비록 순조롭지 못한 일이 따르지만, 후일 그 공효(後日之效)는 틀림없이 창대할 것”이라며 세종에게 미래 대비를 역설한 인물들이었다(세종실록 19/8/6). 수양대군과 안평대군만 해도 그랬다. 그들은 세종 치세에서 유능한 일꾼으로, 탁월한 예인(藝人)으로 중국에까지 명성이 자자할 정도였다. 둘은 라이벌 관계였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친구이자 형제였다. 하지만 단종시대가 되면 둘 사이는 정적 관계를 넘어서서 하늘 아래 함께 설 수 없는 관계로까지 악화된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전형적인 권력추구인으로 만들었을까?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왜 보이지 않았을까?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좋은 울타리의 부재이다. 세종시대는 정치적인 이유로 생존을 걸어야 할 일이 없었다. 태종 상왕기의 ‘강상인 옥사’를 제외하면 30년 재위 기간에 ‘역모’나 ‘반란’의 혐의를 쓰고 처형되는 일은 없었다. 물론 왕과 신료들에 대한 탄핵이나 정책 논쟁은 있었다. 하지만 측근이나 공신에 대한 숙청, 그리고 부모 형제의 처단과 같은 권력집단 내부의 심각한 홍역은 없었다. 이에 비해 단종시대는 계유정난에서 보듯이, 어느 쪽에 줄을 서는가에 따라서 자기 관직과 재산은 물론이고 처자의 신분까지도 온통 뒤바뀌는 그야말로 생존을 건 도박 정치를 해야 했다.
지도층의 좁은 시야와 끼리끼리의 정치는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울타리가 사라진 가운데 각자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고위 정치인까지도 측근과 가족의 이익 챙기기에 바빴다. 민생과 국사(國事) 돌보는 일은 뒷전이었다. ‘단종실록’에는 백성의 목소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왕에게 어려움을 호소하는 농부의 모습이나 억울한 일을 풀어달라며 신문고를 치는 백성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정적 제거의 기회만 노리는 정상배의 모습과 반대쪽 사람을 깎아내리는 사관(史官)의 편당적인 기록만 가득하다. 비밀주의가 만연한 것도 그 시대의 특징이었다. 상소가 들어오면 왕은 늘 “대신들에게 물어보겠다”고 대답했고, 대신들이 결정한 내용은 의정부 담당관리(舍人)의 요약보고 형태로 다시 왕과 신료들에게 하달됐다. “대신들이 모든 일에서 국론을 이미 정한 다음 일방적으로 내린다”는 지적은 그런 정황을 말해준다. 대화 내용이 전부 기록되는 어전회의와 달리, 의정부 대신들의 개별 토론 내용은 모두 비밀에 부쳐졌다. 중요한 국정토의나 강무하는 현장에 사관이 배제된 것도 문제였다. ‘기록하지 말라는 말까지 기록해서’ 태종을 당황시켰던 용기 있는 사관은 더 이상 나올 수 없었다.
그 점에서 1453년 10월의 계유정난과 9개월 뒤의 왕위 찬탈은 겨우 시작된 청신한 정치의 싹을 짓밟은 폭거였다. ‘단종실록’ 편찬자들이 열심히 수양대군에 의한 발란반정(撥亂反正·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바른 정치로 돌아감)의 당위성을 역설했지만, 찬탈이 가져온 정치적 후유증을 없앨 수는 없었다. 첫 번째 후유증은 군신 간의 신뢰붕괴와 생존도박의 가속화 현상이다. 단종과 같이 정당성에 결함이 없는 왕조차도 야심 정치인에 의해 쫓겨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군신들은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됐다.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세조)을 살해하려 한 단종 복위기도 사건(사육신 사건)은 생존도박의 정치를 격화했다. 연산군의 편집증적 대응이나 중종이 자행한 배신의 정치(기묘사화)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찬탈이 가져온 두 번째 후유증은 수많은 인재의 희생이다. 계유정난 때, 그리고 단종 복위기도 사건 때 죽은 사람들은 모두 태종 및 세종시대를 거치면서 길러진 인재들이었다. 김종서·황보인·이징옥은 북방영토의 개척과 방어를 위해 헌신했던 인물들이었으며, 하위지 등 사육신과 김시습과 같은 생육신은 말과 글과 일에 있어서 특출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불신과 반목, 그리고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되곤 했다. 인재를 기르고 보호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시했던 세종시대의 정치전통은 사라지고 없었다.
단종시대를 통틀어 말한다면 ‘삿된 정치가 범람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집권자들은 자기 사람을 키우는 방도로 국가의 인사권을 행사했다. 배웠다는 사람들도 겉으로는 공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사사로움을 추구했다. 자기편은 무조건 감싸고 상대편이라면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던 언론, 민생과 국사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은 제쳐놓고 ‘인심이 기뻐하고 흡족할 일만’ 추진했던 위정자들도 삿된 정치의 주역이었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 용어설명
상피법(相避法) : 상피(相避)란 혈연 등으로 얽힌 사람들이 같은 곳에서 벼슬하는 것을 피하고(①), 역시 그런 사람이 나오는 재판이나(②) 시험에(③) 이해관계가 걸린 사람이 담당관리로 못 나서도록 막는 것을 뜻한다. ‘경국대전’에도 ‘상피’의 항목이 있는데, ①②③ 모두가 열거돼 있다. 다만 각 군영에 근무하는 장교는 상피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상피법은 세종시대 때 논의를 거쳐 정립됐는데, 세종은 그 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나 아예 폐지하는 것 모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상피법의 취지를 살리면서도 현실을 잘 참작해서 절충해야 한다는 게 세종의 입장이었다(세종실록 12/2/23).
주요뉴스
시리즈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