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 명지대 교수·정치학

정치학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을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은 이론을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정부가 기득권 타파를 외치면서 ‘기존 엘리트’들을 교체하려는 경우 기존 엘리트들은 사라지겠지만, 그 후 대중은 ‘새로운’ 지도자에게 의존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정치 체제 속에서 대중은, 말로만 국가의 주인일 뿐 실제로는 정치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라클라우는, 기득권 타파란 단순한 ‘지배 엘리트’의 교체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결론 내린다. 즉, 권력을 잡은 측은 기득권 제거를 주장하지만 결국 자신들 역시 ‘지배 엘리트’가 될 수밖에 없으며, 그런 차원에서 스스로 기득권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문재인 정권에서도 기득권 타파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온다. 문 대통령은 지난 2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신년합동 인사회에서 “신기술, 신산업의 진입과 성장을 가로막는 기득권의 규제도 더욱 과감하게 혁신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또,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4일 대변인 논평을 통해 “새해에는 국민을 위해 일하는 국회가 돼야 한다”면서 “더 이상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기득권과 특권 지키기로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대통령과 여당의 언급에서 공통으로 사용된 용어는 ‘기득권’이다. 집권 4년 차를 맞은 현 정권은 아직도 기득권 계급, 곧 정치·사회적 엘리트들을 ‘그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권력을 가진 측이 이런 멘탈리티를 가지고 있으면 그 부작용이 만만찮다.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이런 멘탈리티가 음모론을 양산한다는 점이다. 음모론이 나오는 것은, 자신들은 기득권이 아니므로 기득권을 가진 ‘그들’이 권력을 가진 자신들을 어떻게든 흔들 것이라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집권 세력이 이런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면 제도의 정당한 활동도 음모론으로 생각하기 쉽다. 기존 기득권들의 ‘음모’로 제도적 기구들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면서, 그 제도적 기구들을 어떻게든 뜯어고치려고 든다. ‘음모’를 가지고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란 피해의식의 발로다. 제도에 대한 신뢰를 강화해야 할 집권층이 오히려 제도를 약화하려고 노력하는 셈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피해의식은 특정 권력 구조의 가장 근간이 되는 원칙, 예를 들어 대통령제라면 삼권분립과 같은 근본적 명제도 흔든다. 이렇게 되면, 장기적으로 국가는 상당한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법과 제도에 의해 운영돼야 국가가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 텐데, 음모론적 시각에서 온갖 제도와 제도적 기구를 뜯어고치려고 하니, 안정적 국정 운영을 기대하기 어려운 건 당연하다.

정치권에, 아무리 레임덕에 빠지더라도 임기 마지막 날까지 대통령은 막강한 존재라는 말이 있다. 정권을 잡으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자신을 피해자라고 규정하고 기득권자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기득권 타파’라는 구호는 허위(虛僞)로서, 적(敵)과 동지의 이분법적 사고 구조를 강화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적을 타도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는 국가 미래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의 균열을 심화시켜 갈등을 더 부추기게 된다.

이제라도 집권세력은 자신들이 권력을 가진 강자임을 인정하고, 동시에 피해자 멘탈리티에서 벗어나야 한다. 권력 핵심들이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모습을 일반 국민은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들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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