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일제 식민시대에 태어나셨습니다. 1930년생. 그것도 정말 정말 재수 없게 평생 생일 밥 못 얻어먹을, 정월 초하룻날에 세상에 오셨죠. 아버지의 일생은 돌아보면 먹고 살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었습니다. 식민시대 산하는 헐벗었고 일제의 공출은 가혹해 먹을 것, 쓸 것 다 훑어갔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1950년 학도병으로 참전한 뒤 가장으로 온 몸을 던져 갖가지 직업으로 살아가셨죠.
큰 병풍 같던 아버지는 말년에 우울증과 정서불안으로 고생하셨습니다. 정신병원에 입·퇴원을 거듭하다가 결국 가출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사람이란 것이 이렇게도 허무하게 질 수도 있는 꽃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기념으로 찍어둔 고희 사진이 뜻밖에도 영정 사진으로 쑥 들어 앉아버렸고요.
아내는 말합니다. “그래도 말년의 며칠은 당신과 함께 보냈잖아. 그게 뜻이 있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가출하시기 나흘 전 부산 중앙동에서 아버지와 함께 머리를 나란히 깎았습니다. 이발소 바닥에 아버지의 하얀 머리카락에 저의 까만 머리카락이 섞이는 것이 왜 그리 눈에 띄었을까요. 그날 길 건너 중국집 화국반점에서 잡채밥을 먹었습니다. 그날따라 아버지는 잡채밥이 먹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날도 평생 자식에게 과묵했던 아버지는 조용하셨지요.
아버지와 같은 날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천상병 시인. 그는 ‘생일 없는 놈’이란 시에서 1930년 설날에 태어나 생일 밥 한 번 얻어먹지 못했다는 넋두리를 시로 썼습니다. 아버지도 천 시인처럼 그냥 세뱃돈이나 주면서 쓸쓸한 생일을 맞으셨겠지요. 그때 우리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비극적 체험은 저를 시인으로 이끌었습니다. ‘잡채밥’이란 시를 썼고, ‘마지막 한 수’라는 시도 지었습니다. 강렬했던 경험은 눈물조차 거두어 가더군요. 아버지를 찾고 장례를 치를 때까지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면서 수첩에 적힌 빽빽한 글을 보았습니다. 근데 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제가 회사를 그만둔 것에 대해 적어 놓으셨습니다. 메모 말미에 써 놓은 글. ‘이 아비 늙었다만 너 하나 밥 못 먹이겠냐. 걱정 마라!’ 제가 대학에 들어갈 때도, 신문사에 입사했을 때도 ‘잘됐네!’ 한마디만 하시던 아버지였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콧물 속에서 엄마 잃은 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그 시절 아버지의 사랑은 일생을 두고 봐야 할 정도로 길고 깊었습니다. 수첩에만 그 마음 적어놓고는 제게는 달리 말씀이 없으셨거든요. 그립습니다. 이 세상 소풍 끝낸 아버지와 천 시인, 두 분이 천상에서는 서로 만나 좋은 친구로 지냈으면 합니다. 그리운 아버지, 올 기일에는 천 시인의 손을 잡고 소풍 가듯 잠시 함께 다녀가셨으면 합니다.
아들 시인 김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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