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US오픈 연장전에서 우승을 다툰 아널드 파머(왼쪽)와 잭 니클라우스. AP연합뉴스
1962년 US오픈 연장전에서 우승을 다툰 아널드 파머(왼쪽)와 잭 니클라우스. AP연합뉴스

파머 추종 극성팬 야유 극복하며
연장전서 완승 첫 메이저 우승
파머 “내 생애 가장 아쉬운 대회”


골프광이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물러가고 존 F 케네디가 집권한 1960년대 초. 미국의 골프는 이미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8년을 집권한 아이젠하워는 백악관 오벌하우스 앞에 퍼팅장과 어프로치 연습장을 만들었는가 하면, 새로 집권한 케네디 역시 싱글 핸디캡을 보유하고 있는 정통파 골퍼였다. 물론 프로골프는 아널드 파머(미국)라는 걸출한 스타의 탄생과 함께 게리 플레이어(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출현하면서 여러 영웅이 다투고 있었다.

이인세 골프역사 칼럼니스트
이인세 골프역사 칼럼니스트
이 중 파머를 추종하는 팬들은 ‘아니의 군대(ARNY’S ARMY)’. 그들은 파머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며 추종했다. 군대의 멤버들은 파머가 경기하는 곳이면 어디건 따라가 그를 응원했다. 1962년 6월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시 인근의 오크몬트 골프장에서 열린 US오픈. 여느 때처럼 아니의 병사들이 응원차 골프장에 집결했다. 아니의 병사들에겐 참가선수 148명이 모두 적이었다. 오직 아니만이 우승해야만 했다.

파머는 첫날 공동 4위, 둘째 날 공동선두로 나섰다. 그런데 무명 선수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잭 니클라우스(미국)였다. 아니의 병사들이 그를 놔둘 리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니클라우스가 파머와 2라운드에서 한 조가 됐다. 프로 데뷔 1년 차 니클라우스는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었다. 반면 파머는 이미 5차례 메이저 대회를 제패한 베테랑. 파머는 군살 없는 몸매에 잘생긴 반면 니클라우스는 뚱뚱하고 못생겼다. 아니의 병사들은 보잘것없는 그가 아니를 사사건건 붙들고 늘어지는 게 못마땅했다. 3라운드에서도 파머는 1언더파로 공동선두, 니클라우스는 1오버파로 2타 뒤진 채 추격하는 중이었다. 니클라우스는 3라운드에서 파머를 피해 앞 조로 나갔고, 극성 팬들을 피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아니의 팬들은 2개 조로 나뉘었다. 한 조는 파머를 응원했고 또 다른 조는 니클라우스에게 야유를 퍼부으며 따라다녔다. 4라운드에 들어가면서 니클라우스를 아니의 우승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선수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팬들의 극성스러운 야유, 아니 저주에도 불구하고 니클라우스는 1타씩 줄여 나갔다. 마지막 4라운드 13번 홀에 이르자 마침내 공동선두가 됐다. 283타로 니클라우스가 먼저 경기를 끝냈고 아니는 18번 홀(파4)에서 3m 버디 기회를 잡아 승리를 눈앞에 둔 듯했다. 그린 주변에 몰린 많은 아니의 병사도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공은 사람들의 염원을 뒤로한 채 홀을 스쳐 지나갔다.

일요일에 벌어진 18홀 연장전은 니클라우스의 무대였다. 아니는 조연이었다. 니클라우스는 아니의 홈구장에서 그의 병사들을 초토화시키며 총사령관 아니를 3타 차로 꺾었다. 니클라우스는 프로 첫 승을 메이저대회에서 거뒀고 전설이 된 통산 메이저대회 18승의 첫발을 내디뎠다.

파머는 생전 “1962년 US오픈이 가장 아쉬웠던 대회”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두 달 전 마스터스를 우승했던 파머는 US오픈은 빼앗겼지만 다음 달 열린 브리티시오픈에서 2연패를 차지했다. 골프역사가들은 니클라우스가 제동을 걸지 않았다면 파머가 1930년 보비 존스(미국)가 이뤘던 그랜드슬램을 1962년에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골프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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