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연(1938∼2019)

“머할라꼬 오노 퍼떡 가서 쉬그래이.” 늘 그랬습니다.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자신으로 인해 자식에게 늘 부담을 준다고 생각한 게지요. 지난해 4월 갑작스러운 투병 중 병원에서도, 밭에서도, 집에서도, 얼굴이라도 보고싶어 찾아뵈면 몇 마디만 나누시곤 “그만 가그래이. 아들(손자) 기다린다”고 돌려보내기 바빴습니다. 자신은 정작 청춘을 바쳐 자식을 뒷바라지해놓고, 준 게 없다면서 그저 미안한 마음만 가지신 게지요.

당신의 유년은 6남매의 막내로 넉넉지는 않았지만, 행복한 기억으로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해방 전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위로 두 오빠와 세 언니의 사랑 속에서 자랐습니다. 활달하고 외향적인 성격에 집안에서 조신한 살림보다, 들로 산으로 다니며 활달한 리더십을 가졌지요. 20살 꽃다운 나이에 남편의 얼굴도 못 보고 직업도, 성격도 모른 채 그것도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걸어가서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신부는 20리 길을 걸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살림에 가마꾼 입이라도 덜어보겠다는 궁색한 시댁의 살림을 이때까지는 미처 모르셨나 봅니다. 집안에는 남편 외에도 봉양해야 할 식구가 많았습니다. 시어른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남편이 아직 동생과 분가하지 않은 살림이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물론이고 작은 시어른 두 분에 시동생 다섯 명의 삼시 세끼에다 빨래로 하루가 짧았습니다. 정치판 등 밖으로만 도는 남편이 무척이나 야속했지만, 하늘은 그것마저 오래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생활 10년, 당신의 나이 30세에 지아비를 잃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30세 청상(靑孀)에게 남겨진 유산은 아들 둘에 배 속의 태아, 그리고 밭 10마지기, 논 5∼6마지기가 전부였습니다.

하늘 같던 지아비를 잃자, 다가온 현실은 아들 셋을 부양해야 한다는 것이고, 슬픔은 뒷전이었습니다. 춘궁기인 봄에는 미나리 베기, 감잎 따기 등 산으로 들로 돈 되는 거라면 뭐든지 닥치는 대로 뛰어다녔고, 여름에는 땅콩밭 매기, 가을에는 추수하느라 허리춤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50세까지 인생의 황금기를 오직 자식 건사에 매달리느라 그 흔한 화장조차 한번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막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이사한 뒤로도 당신의 고단함은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30여 년간의 객지생활도 당신은 그저 불철주야 자식들, 손자들 걱정에 노심초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당신이었습니다. 모두를 감싸고, 모두를 지탱해준 기둥이셨습니다. 이제 그 무거운 짐 내려놓고 고통 없는 곳에서 편안하게 쉬십시오. 당신의 못난 아들이 이제야 놓아드립니다. 어머니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어머니 사랑합니다.

아들 이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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