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격쟁(擊錚)’이란 제도가 있었습니다. 궁궐에 난입하거나 왕이 행차할 때 징이나 꽹과리, 북 등을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뒤에 원통하고 억울한 사연을 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상소제도입니다. 왕이 다니는 길에다 나무 끝에 글자를 써 붙여 왕의 눈에 뜨이게 하기도 했고, 높은 곳에 매달리거나 크게 소리를 질러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격쟁을 행한 사람은 일단 피의자로 간주돼 곤장을 맞지만 대신 억울한 내용을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요.

조선 정조 때에 특히 격쟁이 빈발했습니다. 정조의 한 차례 능행에만 줄잡아 100건이 넘는 격쟁이 있었다니 말 다했습니다. 이렇듯 격쟁이 많았던 건 억울한 일이 많았던 탓이기도 했겠지만, 정조가 백성의 말에 귀를 잘 기울여주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렇대도 격쟁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격쟁이 거짓으로 판명되거나 무고로 판단되면 곤장 100대를 맞는 처벌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호된 매질로 이 과정에서 죽는 이들까지 있었답니다.

한 달 전쯤 전남 신안군 흑산도 상라산 전망대 아래 김이수의 묘 앞에 섰습니다. 김이수. 이름난 학자도, 벼슬아치도 아니었지만 그는 피폐한 섬 사람들을 대변하기 위해 흑산도에서 한양까지 올라가 정조의 앞을 막아섰던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흑산도 주민들은 과도한 부역과 세금에 시달렸습니다. 세금의 항목도 기발합니다. 기와를 만들어 육지로 운반하는 기와세, 밤중에 불을 밝혀 낚시로 잡아 올린 고등어를 상납하는 고등어세, 보리를 베고 콩을 심은 밭작물에 대한 토지세, 청어잡이 배가 정박하면 부과하는 청어세….

그중에서 닥나무 산지라는 명목 아래 부과된 종이세가 가장 가혹했습니다. 더 이상 닥나무가 나지 않아 종이를 만들 수 없는데도 해마다 돈 500냥어치의 종이를 납부해야 했습니다. 섬에서의 삶은 피폐해졌고, 급기야 주민들은 하나둘 섬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김이수가 간절하게 탄원했던 것은 종이세를 거두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4개월의 조사 끝에 정조는 흑산도의 종이세 탕감을 명합니다. 이런 기록은 승정원일기에도, 조선왕조실록에도 남아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김이수가 정조 임금의 행차를 가로막고 격쟁을 한 것은 1791년 1월 18일. 음력이긴 하지만 날짜로만 보면 사흘 뒤가 꼭 229년째 되는 날입니다. 김이수 문중에는 그가 한양으로 떠나기 전에 남겼다는 말이 기록으로 전합니다. ‘말하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듣기가 어려운 것이다.’ 아, 아, 거기, 지금 잘 듣고 계십니까.
박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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