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경험은 지금 살아 있는 사람 중에 내가 제일 오래 했다. 난 이런 일, 저런 일 다 경험한 사람이다.”
김종인 대한발전전략연구원 이사장은 스물셋의 나이에 조부(祖父)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1887~1964) 선생의 비서실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김 이사장은 “할아버지 옆에서 정치를 시작한 게 1963년도였다”며 “그때부터 (군정 종식을 위해) 단일 후보를 만들기 위한 3당(민정당·신정당·민우당) 통합을 지켜봤다”고 회상했다.
조부가 별세한 뒤 독일에서 유학한 김 이사장은 귀국 후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가 됐으나,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참여하는 등 현실 정치 참여를 이어갔다.
1977년에는 보건사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료보험제도를 처음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김 이사장은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기여할 수 있었다”며 “건강보험도 당시 모든 경제통이 반대하는 걸 끝까지 관철해 만들었다”고 말했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보건사회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다. 특히 경제수석 시절 한·중 수교의 실무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국구·비례대표로만 5선 의원을 지낸 김 이사장은 2011년과 2016년, 정반대 진영 정당의 비상대책위원회에 참여하며 한국 정치의 중심에 섰다. 2011년에는 한나라당(자유한국당 전신)이었다. 당시 서울시장 보궐선거 참패와 당 소속 보좌진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디도스 공격 사건 연루 등으로 홍준표 대표 체제가 무너진 상황이었다. 김 이사장은 한나라당 비대위원으로 영입돼 2012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52석을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 이사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내 덕분에 과반의석이 됐다면서 자신도 도와달라고 찾아왔다”고 전했다. 김 이사장은 경제민주화 등 박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총괄했고, 그 결과는 박 전 대통령의 당선이었다.
2016년에는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 전신)의 비대위 대표를 맡았다. 총선을 목전에 두고 제1야당이 새정치민주연합과 국민의당 둘로 쪼개지면서 참패 우려가 높아지던 시기였다. 김 이사장은 당시 안보와 경제에서 중도층을 겨냥한 ‘우클릭’ 전략을 내세우고 과감한 현역 의원 컷오프로 세대교체에 주력했다. 결국 새정치민주연합은 20대 총선에서 1당에 올랐다.
윤명진 기자 jinieyo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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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서울 출생 △중앙고, 한국외대 독일어학과 학사, 독일 뮌스터대 경제학 석·박사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11·12·14·17·20대 국회의원 △국민은행 이사장, 보건사회부 장관, 청와대 경제수석,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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