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⑤ 유치원부터 사교육 전쟁

선착순 입금으로 입학 결정
現원생 추천서 요구하기도

레벨테스트 뒤 자격 주어져
3~5세부터 ‘새끼과외’ 받아

조기 영어교육 수요 많은데
부모 재력이 영어실력 좌우

보육 치중하는 공교육 탈피
정부가 격차 해소 노력해야


7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학부모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진 A 영어유치원(유아 전문 영어학원) 앞에 고급 외제 차들이 줄지어 도착했다. 유치원 수업을 마치고 나온 아이들은 차에서 내린 엄마 손을 잡고 원어민 교사들과 영어로 인사를 나눈 뒤 하나둘 차에 올라탔다. 이 학원 복도에 붙은 ‘교습비 등 변경 등록 신청서’에는 기본 교습비가 171만 원으로 안내돼 있다. 수업 재료비와 급식비, 셔틀비 등 기타 경비를 합하면 원비는 월 220여만 원에 이른다. 전국에서 가장 비싼 교습비를 받는 영어유치원이지만, 강남 엄마들은 자녀를 이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줄을 선다. 대치동에 사는 이모(여·40) 씨는 “이 학원 ‘영유’(영어유치원의 줄임말) 5세 반의 경우 ‘1년 대기는 기본’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강남 4구(강남·서초·송파·강동구) 등 서울 주요 지역과 지방 주요 대도시에서 ‘유아 사교육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어릴 때 영어 교육을 하면 좋다”는 인식에 따라 재력이 있는 부모들을 중심으로 영어유치원이 미취학 아동의 기본 교육 코스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일각에서는 미취학 아동 학부모들의 영어 수요가 분명한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영어 교육 프로그램이 전무해 ‘잉글리시 디바이드’(영어 격차)가 커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잉글리시 디바이드’는 부모의 재력에 따라 영어 실력 차가 나타나고, 이 차이가 다시 빈부 격차를 만든다는 뜻이다.

◇‘선착순 입금’ ‘새끼 과외’ 고가 영유 입학전쟁

영어유치원은 전일제(종일반) 기준으로 일반 유치원보다 4∼6배로 비싸다. 전희경 자유한국당 의원실에 따르면 영어유치원의 월평균 교습비는 2019년 기준 90만7000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기타 경비까지 포함하면 월 96만6000원에 이른다. 전국 평균 교습비가 이 정도고, 서울 주요 지역 인기 영어유치원의 경우 재료비, 급식비, 셔틀비 등을 합치면 월 120만∼150만 원에 이른다. 서울 용산구의 학부모 김모(여·38) 씨는 “부대 비용을 포함해 월 130만 원씩 영유에 낸다”며 “교습비 부담이 분명 되지만, 좋은 환경에서 아이 교육을 시키고 싶어 영유에 보내는 결정을 했다”고 말했다.

영어유치원 입학 경쟁은 치열하다. 강남구에 있는 한 영어유치원은 지난해 말 특정일 오전 9시에 입학금을 우선 입금하는 순서로 입학 순서를 결정했다. 그 결과, 9시 정각에 돈을 입금한 학부모들만 입학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입금했다가 순위에 들지 못해 환불받은 정모(37) 씨는 “단 1초 늦게 보냈는데, 입학이 안 되고 대기로 밀려 황당했다”며 “짐작은 했지만, 영유 입학 경쟁이 이 정도일 줄 몰랐다”고 말했다. 강남 일부 유치원의 경우, 선행 학습도 필수적으로 해야 입학할 수 있다. 교습비가 전국에서 가장 비싼 대치동의 A 영어유치원은 4세 전부터 영어 공부를 따로 하지 않으면 입학이 사실상 어렵다. 이 학원은 1차 영재판별 테스트에서 상위 5%의 성적을 거두고 2차 레벨 테스트에서 영어 읽기와 쓰기, 말하기 시험을 통과한 아이들에게만 입학 자격을 준다. 재시험을 서너 번씩 치르는 아이들도 있는 만큼 영어를 한 번도 접하지 않고선 통과가 어렵다.

이 학원 이외에도 6∼7세 이상부터는 레벨 테스트를 거쳐야 입학 자격을 주는 영어유치원도 많다. 이렇다 보니, 영어유치원 입학을 위해 ‘새끼 과외’를 받는 아이들도 있다. 유아·아동을 대상으로 수업하는 원어민·교포 튜터(개인 지도교사)를 알선하는 사이트도 등장했다. 강남, 송파, 목동 지역의 학부모들이 모이는 한 카페에는 “4세 남아 A 영유 준비해주실 과외 쌤을 구한다”는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개인 튜터를 소개해달라는 댓글도 줄을 잇고 있다.

◇“뒷돈 주고라도 추천서 받아야”…영유·유치원 입학에 불공정 논란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영어유치원은 추천서 입학 전형을 실시하고 있다. 일반 모집에 앞서 기존 원생의 친척이나 친구들을 상대로 추천서를 받아 입학시키는 방법이다. 한 육아 카페에서 이 영어유치원의 추천서를 보유하고 있다는 글이 올라오자, 다른 학부모들의 관심을 표하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도곡동에 사는 이모(여·40) 씨는 “학원 자율에 따라 입학 전형을 실시한다고는 하지만, 추천을 못 받는 부모 입장에서는 억울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영어유치원과 함께 인기가 높은 유명 사립 유치원 일부에서는 추천서 관행을 유지하고 있는 곳도 있다. 실제 지난해 유치원 등록 기간(9∼12월) 동안 전남과 경남의 사립 유치원 두 곳에서 처음으로 모집요강에 없던 추천 입학 전형(우선 모집 내 전형)을 학부모들에게 안내한 사례가 교육 당국에 적발됐다. 또 부산지역 사립 유치원 3곳에서는 재원생 명의로 등원 희망자 추천서를 받은 사례도 발견됐다. 추천서를 통한 원생 모집은 교육부가 ‘불공정 사례’로 간주해 엄격하게 금지하는 행위다.

◇커지는 ‘잉글리시 디바이드’…대안 마련 목소리도

조기 영어 교육 수요가 명확한 만큼, 재력이 없어도 영어 교육을 받을 기회를 줘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현재 미취학 아동 공교육은 보육 중심이다. 만 3∼5세 유아들에게 균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누리과정’은 교육보단 보육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공교육과 사교육의 갭(차이)이 벌어지면서 계층별 교육 기회의 격차 역시 심각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결국, 교육 소외 계층 아이들은 이후 치열한 입시 경쟁에서 사교육을 지속적으로 받는 아이들을 따라가기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조기 영어 교육에 따른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사실이고, 이 격차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이어 “정부나 지자체에서 원어민 강사를 일정 부분 고용해 아이들이 외국인 강사와 학습으로 영어에 거부감을 줄일 수 있게 도와주는 방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정부나 지자체 차원의 획일적인 영어 교육 지원은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김성천 한국교원대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는 “만약 특정 지자체에서 먼저 영어 교육 지원을 시작하면, 다른 지자체에서 연쇄적으로 따라가 서로 경쟁하는 양상을 보이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손기은 기자, 최근주·정현주 인턴기자

관련기사

손기은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