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조선 세조의 광릉. 세조가 생전에 이 주변의 숲에 반해 자신의  능으로 정했다가 왕비인 정희왕후와 함께 묻혔다. 광릉은 능림으로 조성돼 보호되다가 지금의 국립수목원으로 확장됐다.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조선 세조의 광릉. 세조가 생전에 이 주변의 숲에 반해 자신의 능으로 정했다가 왕비인 정희왕후와 함께 묻혔다. 광릉은 능림으로 조성돼 보호되다가 지금의 국립수목원으로 확장됐다.

■ 역사인물학

박현모의 한국형 소통이야기 - ⑥ 세조가 세종에게 못배운 것

‘조선의 비스마르크’… 초법적 권력찬탈과 이후의 업적 상반된 평가
세종 집현전 등 의견수렴 기구 폐지… 지나친 왕권중심으로 건전 비판 못받아들여


“쿠데타와 위압으로 집권하고 즉위했기에 그 왕위의 명분과 정통성의 하자를 은폐하기 위해 또 다른 불법을 자행한 철권통치자.”(최승희 2002). “그의 시대에 우리나라의 문물이 미증유의 융성을 이루었다.”(한영우 1983).

조선의 7대 왕 세조(世祖, 1455∼1468년 재위)에 대한 상반된 평가다. 앞의 부정적 평가는 그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행한 살육과 초법적 조치를 강조한다. 반면 후자는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이룬 업적, 즉 여진족 토벌과 ‘경국대전’의 기틀 마련과 같이 조선왕조 체제를 정비하는 등의 굵직굵직한 일에 주목한다.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태평시대’를 즐겼다고 한다.(세조실록 3/4/22). 즉위과정이나 통치방식에 있어서는 심각한 흠결이 있지만,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국방을 튼튼하게 만든 지도자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리고 세조는 어떻게 세자가 아니면서도, 안평대군 등 여러 경쟁자와 사육신처럼 목숨을 걸고 반대하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왕이 될 수 있었을까?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이 2018년 공개한 세조 어진 초본. 일제강점기 화가 김은호가 1735년의 세조 어진 모사본을 다시 옮겨 그린 것이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이 2018년 공개한 세조 어진 초본. 일제강점기 화가 김은호가 1735년의 세조 어진 모사본을 다시 옮겨 그린 것이다.
실록에 나타난 그의 언행을 보면, 세조야말로 ‘스스로의 운명을 기획하고 국가의 권세를 제압한(策運制權)’(세조실록 14/11/21) ‘조선의 비스마르크’라는 생각이 든다.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짓는 것은 연설이나 다수결이 아니라 철과 피”라고 믿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반전카드로 정치의 주도권을 쟁취해” 간 것처럼(강미현, ‘비스마르크평전’ 2010) 세조 역시 결단력과 전광석화 같은 일 처리 방식으로 정적을 제압했다. “내가 남을 이기는 방법은 정어미쟁(定於未爭), 즉 싸우기 전에 미리 대비해 놓고 하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처럼, 세조는 일 처리에서 치밀한 사전 준비를 생명처럼 여겼다(세조실록 ‘총서’). 1453년 ‘계유정난’ 당일 새벽에 그가 동지들에게 밝힌 거사일정, 김종서를 제거하는 과정, 그리고 조계사 근처에서 생살부에 따라 정적을 척살하는 과정 등을 보면, 그가 “일을 벌이기 전에 생각을 먼저 하되, 꼭 필요한 일에 온 마음을 집중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조에 따르면 “사물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을 때는 오로지 그 마음 중심을 지키는 것이 수습과 해결의 첩경”이다. 지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유혹이나 도전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마음 중심을 굳게 잡는 일(守心)인데, 그렇게만 한다면 먼저 할 것이 무엇이고 나중에 할 게 무엇인지가 선명해진다. 바로 그때 전광석화처럼 일을 추진하면 된다는 게 세조의 생각이었고 일하는 방식이었다. 왕자 시절에 그는 “나는 남이 하는 것은 하지 않고, 반드시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하는 자”라고 스스로를 정의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 그는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간 사람이었다. “일이라는 것은 모두 세(勢)의 흐름의 영향을 받는데, 세란 것은 하늘의 뜻이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 더욱 중하다. 어리석은 자는 하늘에 미루고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자세히 살핀다(愚者推之於天 智者審之於人)”고 하여,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길이 있다고 믿은 그는 매사에 치밀하게 준비하되 일단 결정하면 무서우리만치 놀라운 힘으로 개척해 나가곤 했다(세조실록 ‘총서’).

영화 ‘관상’에서 세조를 연기한 이정재.
영화 ‘관상’에서 세조를 연기한 이정재.
14년간의 그리 길지 않은 재위기간에 이룩한 놀라운 업적, 즉 ‘진관(鎭管)체제’라고 불리는 향토방위 개념에 기초해 전국적인 방위체제를 수립한 일, 세종의 정책을 이어받아 대규모 사민과 토지개간 사업을 추진해 농업생산을 증대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킨 일, 하늘 제사를 복원하고 많은 편찬사업을 통해 나라의 줏대와 의식을 고양한 일, 그리고 잘 알려진 것처럼, 조선왕조 운영의 기틀이 된 종합법전 ‘경국대전’을 편찬한 것 등은 바로 그런 개척정신과 일하는 방식의 결과였다.

그런 세조도 ‘제도화’와 ‘소통’의 측면에서 볼 때는 낮은 평가를 면치 못할 듯싶다. 그는 부왕 세종이 세워놓은 몇 가지 정치제도를 폐지했다. 집현전과 경연제도를 그만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세종은 ‘과거의 경험을 스승 삼아’ 나랏일을 계획하고 추진하기 위해 집현전이라는 싱크탱크를 잘 활용했다. 그런데 세조는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집현전 신하들이 주관하는 경연에서 ‘별로 도움받을 게 없다’고 판단해 재위 2년 만에 집현전과 경연을 모두 폐지했다. 그는 또한 세종시대의 의정부서사제, 즉 정승들에게 국정 서무를 맡기고 중요한 일만 왕이 결정하는 제도는 ‘왕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君薨之制)이며, 대권(大權)을 아랫사람에게로 옮겨가게 하는 것(權移於下)’이라면서 육조직계제를 부활시켰다(세조실록 1/8/9).

왕이 나라의 대소사를 직접 보고받고 결정하는 육조직계제가 부활되면서 모든 일이 왕에게 쏠렸다. “과인의 말이 곧 법(吾言卽法也)”(세조실록 2/5/7)이라면서 감옥 재판과 화폐제도까지도 왕이 직접 재결하면서 정승은 이제 한낱 왕의 측근으로 전락했다. 과거 황희 등이 발휘했던 ‘정승리더십’, 즉 사람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도입해 시험해 보려 할 때 신중을 요구하고 성과 거두는 정책만을 추진하게 하는 역할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민들의 귀와 입이 모두 왕에게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유시(諭示)’라는 이름으로 내려오는 왕의 지시를 순순히 따르는 신료들만 충성스러운 인재로 평가받았다. 왕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거나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은 큰 곤욕을 치르거나(이계전의 경우), “하위지 같은 무리”라고 하여 말만 앞세우는 썩은 선비(腐儒)로 취급됐다.

백성들 역시 이러한 ‘소용돌이 정치 현상’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들은 왕이 궁궐 내에서 이동할 때나, 온양온천에 머물 때를 이용해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곤 했다. 경복궁 뒤 백악에 올라가 깃발을 흔들고 징을 쳐서 왕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세조실록 14/5/16). 봇물 터지듯 백성들의 직소(直訴)가 밀려들자 왕이 일일이 대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재위 말년에 이르러 ‘밀봉과 탐주(探籌)하는 법’, 즉 궐내와 성문 밖에 상자(?)를 놓아두고 원통한 일을 그것에 던져 호소하거나, 직접 투호(投壺=籌)를 잡고 흔들면 왕이 친히 묻고 판결하는 제도를 혁파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세조실록 14/6/20).

세조의 인치적(人治的) 통치스타일은 그의 ‘주석(酒席)정치’(최승희 2002)를 통해 극명하게 나타났다. 그는 빈번하게 술자리를 베풀곤 했다. 경복궁 사정전에서 국가의 정례 회의를 마친 후 조촐한 술자리를 베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으로 신하들을 불러 국사를 의논하며 설작(設酌)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재위 5년째인 1459년 8월 세조는 교태전으로 “재상과 종친들을 불러들여 왕비와 더불어 경서를 강한 다음 설작”했는데(세조실록 5/8/1), 이날 정인지가 왕에게 무례한 말을 하여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다음날 신하들이 정인지의 무례를 들어 처벌을 요구하자 세조는 “정인지의 무례한 짓은 어제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다. 매양 술에 크게 취하면 이와 같으니, 어찌 책망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정인지는 계유정난과 사육신사건 등을 통해 세종시대에 함께 일했던 인재들과 집현전 동학들이 제거되는 과정을 보아서 그런지 잔치가 시작되면 과음을 했고, 때로 세조를 너(汝)라고 부르기도 했고, “술잔을 들고 담론을 하다가 갑자기 (왕을) 욕하기도” 했다(세조실록 6/11/3). 세조는 이것이 모두 술 때문에 일어난 실수라고 하여 덮어주곤 했다. 세조의 이러한 ‘주석정치’는 왕과 신하들의 친밀감을 조성하고, 취한 가운데 쏟아내는 속마음을 들으려는 왕의 의도에 따라 재위 기간 내내 계속됐다. 하지만 과음으로 인해 군신들은 건강이 악화됐고, 술 취한 중의 실언과 실수로 인해 파직 내지 유배당하고 심지어는 참형 당하는 신하들도 있었다.

재위 기간 내내 세조의 국정은 소수 충성파를 중심으로 운영됐다. 왕위에 오른 뒤 그는 여러 차례 충성파를 공신에 책봉했고 그들의 자손을 요직에 앉혔다. 자주 활쏘기 시합을 벌였으며 술자리를 만들어 충성(loyalty)을 다짐받았다. 신숙주·한명회·정창손 등 충성파에게는 엄청난 부와 권력이 주어졌다. 반면 사육신이나 생육신 혹은 그 후손들에게는 죽음과 패가망신이 뒤따랐다. 그 시대 사람들은 충성파와 이탈자(exit)로 양분됐다. 중간에 서서 잘한 일은 지지하고 잘못된 것은 비판하는 사람들의 건전한 목소리(voice)는 거의 들을 수 없었다. “내가 즉위한 이후로 언관들이 말을 다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세조의 말은 그러한 정황을 보여준다(세조실록 3/7/11).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중간에 서서 지켜보는 관망파다. 집권자가 사회적 희소자원을 무한정 나눠 줄 수 없는 게 현실인 만큼 관망파로 하여금 이탈자의 대열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성원 대다수를 차지하는 관망파의 목소리를 수용하고 그들 중에서 인재를 충원해야 한다. 세종이 신하들에게 ‘국가경영에 필요한 절실한 말이라면 왕 앞에서 얼굴 붉히면서까지 강직하게 말해 달라’고 거듭 요청하고, 천한 신분의 인재와 정적까지도 발탁해 중용한 것은 ‘비판의 정치학’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조의 리더십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권력 잡는 법에는 탁월했으나 정치하는 법에는 서툰 지도자였다고 하겠다. 세종보다는 태종에 가까운 정치가였던 셈이다. 재위 후반에 그가 “나를 따르지 말고 세종을 배우라”고 어린 세자에게 당부한 것은 아마도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 용어설명

비판의 정치학 : 경제학자 허슈먼(A O Hirschman)은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Exit, Voice, and Loyalty·1970)에서 조직 운영자가 잘못했을 때 구성원들이 보이는 행동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먼저 ‘충성심(Loyalty)’을 보이는 구성원은 현재의 조직 운영에서 얻는 바가 크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고, ‘건전한 비판자(Voice)’는 조직 안에 머무른 상태에서 불만을 얘기했을 때 개선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의 ‘이탈자(Exit)’는 항의하거나 요청해봤자 변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해서 떠나는 사람들이다. 조직 운영자가 꼭 해야 할 일은 가장 숫자가 많은 ‘건전한 비판자’를 이탈자의 대열로 가지 않게 하고, 계속해서 희망을 갖고 개선 사항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모든 조직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인 느슨함, 즉 비합리적이거나 비효율적인 조직 운영의 문제점이 개선될 수 있다’는 게 허슈먼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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