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세근 교수가 분석한 ‘기생충과 한국문화’
한류문화 선봉 K-드라마엔
희극과 비극의 변증법 존재
심청전·춘향전도 같은 구조
‘살인의 추억’이원 대립 극명
임권택 ‘씨받이’ ‘서편제’는
거룩·숭고미…서양전통 부합
비극을 희극으로 그린 기생충
슬픈 만큼 웃긴 요소도 많아
괴리된 감정연기 송강호 ‘한몫’
영화와 드라마는 많이 다르지만, 사실 세계 문화의 문을 먼저 두드린 것은 영화보다는 우리 드라마였다. 그러한 드라마 중 ‘겨울연가’와 ‘대장금’에는 한국 드라마만이 보여주는 서사의 특이점이 있다. 그것은 엄숙과 희롱의 평행선이고, 울음과 웃음의 혼성이고, 비극과 희극의 변주다. 음과 양의 ‘사이좋은’ 변증법이라고 해도 좋겠다. 배용준과 여자 친구가 엄숙의 길을 가면 그들의 친구나 상사는 웃음으로 간다. 이영애와 남자 친구가 진실의 길을 갈 때 그녀의 엄마·아빠는 티격태격 코믹의 세상을 연다. 어렵게 골계미(滑稽美)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런 사어가 필요 없을 정도로 희극의 타이밍에서는 그저 웃긴다.
미국 드라마(미드)에서 비극과 희극이 섞여 있는 것을 과연 몇이나 찾을 수 있을까? 장엄하면 줄곧 엄격하고 슬랩스틱코미디면 줄곧 넘어지고 자빠진다. 채플린 정도가 블랙코미디에 가까울까, 거의 비슷한 무게로 희비극을 이어나가는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극작(서사)은 쌍방향 나가기, 희비(喜悲) 병진(竝進), 울리고 웃기는 두 이야기가 상응하는 평행주의(parallelism)에 충실하다.
이런 희비극 통합의 형태는 한국적인 심성을 잘 담는다. 희비극이 교차할 수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수도, 둘을 넘어 셋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 하나, 희비 병진이다. 슬픔과 웃음이 함께 가며 슬플수록 웃음을 담고 웃길수록 슬픔을 담아야 한다. 이런 것이야말로 일종의 ‘승화(sublimation)’이자 ‘전복(overthrow)’이다. 서구 미학의 형이상학에서 승화는 희극미를 이른바 ‘숭고미’로 변화시키는 일이며, 우리의 사회학에서 전복은 슬픔을 통해 승리의 기쁨으로 뒤바꾸는 일이다. 앞엣것은 천국을 건 종교적 타협이고, 뒤엣것은 사람의 세계를 위한 혁명의 역사다. 현재 우리가 처한 세계는 그러한 위대하지만 슬픈 혁명을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된 것이 없어 허망하게 웃긴 혁명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한다.
봉준호 감독이 그리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혁명조차 어려운 웃긴 상황, 상위계급을 죽이고 싶지만 같은 계급부터 죽여야 하는 얄궂은 처지, 부르주아의 순박함과 진실성, 프롤레타리아의 사기성과 무식함, 돌을 던지지만 빗맞고야 마는 우리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그에 의해 그려진다. 셰익스피어의 광대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봉 감독의 작품에서는 개들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냄새 나는 그들을 찾아내고 짖어대고 그들을 먹여 살리는 권력과 그 하수인에게 충정(忠貞)을 바친다. 봉준호의 섬세함, 곧 ‘봉테일(Bong’s detail)’이 살아나는 장면들이다. 천민은 또한, 왜 하필이면 아메리칸 인디언으로 분(扮)해야 하는가? 분장 속 분장이라는 구조적이자 층위적인 문법이 돋보인다. 봉준호식 웃음 코드가 없었다면 미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을 것이다. 그 코드는 방자의 코드이며, 뺑덕어멈의 코드에서 기원하고 있다고 믿는다. 월매 코드, 심 봉사 코드라고 해도 좋다. ‘기생충’ 속 배우의 역할에 ‘춘향전’이나 ‘심청전’의 인물을 대입해 보라.
봉 감독에게는 운의 신도 손을 내밀었다. 미국 중심, 미국 일색에서 아시아로 문을 열려 할 때 ‘결정적인 작품’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그들이 ‘외국어영화상’을 ‘국제영화상’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기 전에는 상을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엘리트적인 유럽 영화의 ‘물렁물렁함, 심심함, 느림의 미학’ 시장에서 성공하고 미국으로 건너온 것도 한몫했다. 유럽에서는 상을 받을 수 있었지만, ‘빠르고 가볍고 빵빵 터지는’ 대중적인 미국 영화 시장에서 ‘기생충’과 같은 영화가 대접받기는 정말로 힘든 것이었다. 이른바 아카데미는 ‘기생충’을 통해 유럽에까지 손을 뻗치게 된 것이다. 보통 상술이 아니다. 이제 유럽과 미국이 감성의 교집합을 가질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구원투수 봉준호의 역할은 대단하다. 콘티넨털 브렉퍼스트(유럽식 무거운 아침)와 아메리칸 브렉퍼스트(미국식 가벼운 아침)가 봉준호식의 국물을 우려낸 한국 해장국으로 통일된 셈이다.
그런 점에서 봉 감독의 영화 가운데 희비극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 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살인의 추억’을 들고 싶다. 바보와 사이코패스, 무식과 민완, 권위주의 시대와 이성(‘우상과 이성’), 남자와 여자, 지방과 서울, 짜장면과 구둣발, ‘향숙이 예쁘다’와 ‘손이 고왔어요’라는 이원(二元)의 대립을 잘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살인’이라는 어휘와 ‘추억’이라는 어휘의 대립도 그렇다. 나쁜 것과 좋은 것 사이에서 오묘한 긴장이 발생하고, 이어 솟구치는 범죄와 잇따르는 황당함이 있다.
봉 감독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말에 충실한 것도, 나는 그가 ‘(가장) 한국적인 웃음’을 ‘인류의 (보편적) 슬픔’ 속에서 구현하는 데 성공하게 된 동기라고 본다. 웃는다고 해서 메시지 전달이 엉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봉 감독이 형님이라고 부른 쿠엔틴 타란티노의 엉뚱함도 비슷하다. B급 내용 속에 담는 충성과 사랑과 같은 A급 정서, 자신의 영화 자체를 싸구려 소설(‘펄프 픽션’)로 취급하는 자폭, 만화 같은 여과 없는 잔인성도 결과적으로는 웃기는 것이다.
오스카와 친해지고 싶으면 희비극이 혼재하는 우리나라의 상갓집에서 화투도 치고, 싸움도 하고, 구성진 노래라도 한 곡 부르길. 너에게는 비극이지만 나에게는 희극이라고. 그러나 나의 희극도 곧이어 비극이 될 것이라고. 희비극을 나누는 것 자체가 희극이라고. 비극에 매달리는 것도 곧 희극이라고. 그래서 희극과 비극의 불변하는 정체성을 말하는 서구의 극작·인물·성격의 구성이 비극적이고, 비극적이어서 오히려 희극적이라고. 이렇게 끝까지 자상하게 관객을 웃겨야 한다.
‘오이디푸스’와 ‘맥베스’는 너무 심각해서 웃을 수 없다. 그러나 ‘기생충’은 웃기기 때문에 슬프다. 한류도 바로 이런 ‘감성’(서양인이 말하는 ‘감각’) 또는 ‘심성’(한국인이 말하는 ‘품성’)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봉 감독의 연출은 이렇게 비극성을 희극적으로 그려내는 데 탁월하다. 그의 웃음은 춘향이와 이몽룡이 가지지 못한 방자와 향단이의 웃음인 것이다.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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