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니 밀러는 188㎝의 큰 키를 이용한 파워풀한 스윙을 구사하며 1970년대 중반 최고 선수에 올랐다.
조니 밀러는 188㎝의 큰 키를 이용한 파워풀한 스윙을 구사하며 1970년대 중반 최고 선수에 올랐다.

힘찬 동작이 일품인 ‘숨은 강자’
파머·니클라우스·트레비노 등
최종일 서로 견제속 타수 잃고
8언더 몰아쳐 첫 메이저 우승


이인세 골프역사칼럼니스트
이인세 골프역사칼럼니스트
1960∼1970년대 미국은 남자골프의 전성기였다. 아널드 파머, 잭 니클라우스, 게리 플레이어, 리 트레비노가 돌풍을 일으키는 가운데, 팬들이 간과했던 한 선수가 있었다. 조니 밀러였다. 밀러는 톱 랭킹은 아니었지만, 미국 남자골프계에서 한 획을 그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몇 안 되는 정통 엘리트 출신의 골퍼였다. 그는 중학생 시절 골프에 입문한 뒤 유타주 브리검 영 대학의 골프팀을 거쳐 1969년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 데뷔했고 4년 뒤 자신의 진가를 알렸다. 1973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의 오크몬트 골프장에서 열린 US오픈이었다. 11년 전 홈 그라운드의 파머가 신출내기 니클라우스에게 패했던 곳. 10년이 지났건만 ‘아니의 군대’로 불리는 골수 팬들이 파머를 여전히 연호했다. 니클라우스와 플레이어, 트레비노 등 당대 최고의 영웅들도 모두 출전했다. 밀러는 이미 PGA투어에서 2승을 거뒀지만, 팬들에겐 ‘26세의 신인’쯤으로 여겨질 만큼 존재감이 없었다. 밀러는 2년 전부터 마스터스 준우승 등 메이저대회 톱 10에 몇 차례나 이름을 올린 실력을 갖췄지만, 워낙 기라성 같은 스타들로 인해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특히 밀러의 스윙은 임팩트 시 뿜어내는 파워풀한 동작이 일품이었다. 다부진 체격에 강한 인상을 풍기던 밀러의 스윙은 니클라우스만큼이나 1970년대의 ‘정통’이었다.

공교롭게도 밀러는 1, 2라운드에서 파머와 같은 조였다. 아니의 군대들이 11년 전 니클라우스에게 했던 것처럼 밀러를 향해 고성과 야유를 퍼부었다. 밀러는 그럼에도 2라운드 후 2언더파 140타로 니클라우스와 함께 공동 3위를 달렸다. 하지만 불운은 3라운드에서 시작됐다. 코스 정보를 담은 야디지 북을 숙소에 두고 나왔다. 아내가 뒤늦게 가져다 준 야디지 북으로 경기를 마쳤지만 3라운드에서만 5타를 잃었다. 마지막 4라운드는 파머를 포함해 4명이 6언더파로 공동선두였다. 2오버파로 12위였던 밀러는 챔피언 조보다 1시간 앞서 출발했다. 그를 눈여겨보는 갤러리나 팬이 없는 가운데 밀러는 외롭게 경기를 이어나갔다. 갤러리들은 모두 기라성 같은 영웅들이 속한 선두 조에 모여 있었다. 밀러는 첫 홀부터 4번 홀까지 버디 행진을 이어나갔다. 그린 적중률 100%였다. 5번 홀 이후 나머지 홀에서 버디 5개를 더했고, 보기는 1개만 기록했다. 마지막 날 밀러는 8언더파 63타를 쳤다. 파71이던 오크몬트뿐 아니라 역대 메이저대회에서 처음 나온 타수였다. 이 기록은 2016년 디 오픈에서 헨리크 스텐손(스웨덴)이 경신하기까지 무려 42년간 깨지지 않았다. 일찌감치 경기를 마친 밀러는 합계 5언더파 279타였다.

파머와 니클라우스, 트레비노 등 선두 그룹은 서로를 견제하느라 출발 때보다 4타나 잃고, 2언더파로 공동 3위로 밀려났다. 무명 존 실러가 밀러에 이어 1타 차 준우승을 차지했다. 밀러는 이렇게 자신의 첫 메이저대회 트로피를 손에 넣었다. 밀러는 1974년 디 오픈을 포함해 한해에만 시즌 8승을 올리며 상금 랭킹 1위에 올랐다. 밀러는 1960년대의 파머 이래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밀러는 이후 시니어투어(현 챔피언스투어)에 진출한 뒤 방송 해설가로 변신했다. 밀러는 골프채 대신 마이크를 잡고 NBC 골프 해설가로 인기를 얻으며 그 어떤 골프영웅들도 하지 못했던 반전을 일궈냈다. 1990년부터 30년 동안 골프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이미지로 골프팬들의 곁에 늘 있었던 그는 2019년 해설가로서 은퇴를 선언했다.

골프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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