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녀(1908∼1992)

‘6·25 전쟁 통에 남편, 큰아들과 생이별한 여인.’

열아홉에 납돌댁 맏며느리로 시집와 병으로 자식 둘을 먼저 떠나보내고, 난리 통에 어린 두 남매와 남겨진 할머니 상황. 그 혼돈의 세월 속에서도 전쟁으로,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은 여덟 명의 조카까지 품고 키우신 분, 우리 할머니입니다.

생전에 조카며느리들이 “어머니! 어머니”하며 따르던 모습이 어린 시절에는 참으로 의아했지만 이제 저도 자식을 낳아 키워보니 그 마음과 책임감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새삼 깨닫습니다. 전쟁의 화마로 인해 불탄 집터에 작고 가녀린 몸으로 구들장이며 기왓장이며 이고 지고 와 손수 지으셨다던 낡고 작은 집. 그 집을 바라보며 제 손을 잡고 옛날이야기를 해주시던 할머니의 눈은 왠지 슬퍼 보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떠돌고 떠돌다 중국에서 배웠다던 뜻도 모를 외국 노래를 들려주시던 그때는 당신의 고단했던 삶을 가늠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식 걱정, 손주 걱정이 끝이 없던 할머니! 마흔이 넘은 아버지의 출근길에 항상 문밖까지 나와 “얘야 차 조심하거라” 당부하시고 뒷모습을 바라보던 분. 말썽꾸러기였던 막내 손주가 비 오는 날 학교라도 갈 때면 우산을 챙겨 방앗간 길까지 한참을 따라와 씌워주셨지요. 간식거리라고는 없던 시절 작은 마을에 엿장수라도 나타나는 날이면 고무신을 들고 한달음에 달려가던 손자 뒤에서 “넘어진다, 천천히 가거라”라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쫓아오시던 할머니. 그러고는 엿장수 아저씨에게 “우리 애들 좀 더 많이 챙겨주시구려”하고는 넌지시 빈 병을 내미셨습니다.

읍내 장(場)에 다녀오시는 날엔 꼭 눈깔사탕을 사 오셔서 찬장에 넣어두고는 하나씩 꺼내 주시던 사탕 맛이 왜 그리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쪽찐머리를 하셨던 할머니, 머리에 꽂은 비녀를 빼시면 발목까지 떨어지는 희끗희끗한 머리칼. 그 긴 머리를 매일 참빗으로 빗으며 단정하게 한복을 즐겨 입으셨던 꼿꼿한 분이셨습니다.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두 해 전 낙상사고를 당하신 뒤에는 치매로 힘겨워하셨죠. 그러고는 2년여의 투병 끝에 어느 날 또렷해진 정신으로 “목욕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시고 그렇게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평생 꼿꼿하셨던 성품이기에 하늘로 떠나시는 길을 정갈히 하고 가신 것이겠지요. 할머니가 주시던 사탕에 헤∼하고 웃던 제가 이제는 마흔을 훌쩍 넘어 두 아이의 아빠가 됐습니다. 그리고 올해 첫째가 중학생, 둘째는 초등학생이 됩니다. 손자 바보셨던 할머니가 계셨더라면 증손자들을 얼마나 더 예뻐하셨을까요.

달력을 보니 어느덧 할머니의 기일이 다가옵니다. 직장생활에, 타향살이에 올해 제사도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매해 그렇듯 북쪽 하늘을 향해 절 올리는 것으로 대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보고 싶습니다, 할머니.

막내 손주 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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