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최초의 여성 천문학자 미첼
세계 첫 프로그래머 러브레이스
여성 해방 선구자 마거릿 풀러…
시대와 장소 뛰어넘은 재능으로
고정관념 초월 인식의 지평 확장
여성·퀴어들 영웅전이자 지성사
마리아 포포바는 내 인생의 영웅 중 하나다. 포포바가 독자들에게 기부를 받아 운영하는 웹사이트 브레인피킹스(brainpickings.org)에 한 번이라도 들러본 이들은 단번에 그 ‘읽기의 에덴’에서 살기를 바란다. 좋은 책을 선별해 생각의 정수만 뽑아낸 글들, 하나의 구절이 다른 구절과 이어지면서 핵심에 다가가는 서술들, 문학·예술·과학 등을 넘나들면서 펼쳐지는 대화들…. 무슨 글을 읽어도 통찰이 넘치고 어떤 글을 봐도 지혜가 샘솟는다. 읽기 중독자로서 어찌 이런 집 하나를 꿈꾸지 않으랴.
이 책은 ‘읽기의 뮤즈’ 포포바의 국내 첫 번역서다. 원제는 ‘figuring’. 형상화, 즉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일, 상상한 것을 떠올리게 하는 일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의미의 빛을 던져서 잊힌 진실을 두드러지게 하는 일이고 감춰진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일이다. 무엇이 잊히고 또 감춰졌는가. 남성, 이성애자들이 기록해온 지성의 역사에서 ‘선택적 소거’(버지니아 울프)를 지속해서 당해온 여성과 퀴어를 포함하는 새로운 지성사다.
지성이란 기존 앎에 대한 확인이 아니라 비판적 질문을 포함하는 성찰이다. 편견 속에서 “잠든 사람들을 깨우는 일”이고 한 시대의 고정관념을 넘어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일이다. 포포바와 함께하는 이 지성의 여정은 요하네스 케플러에게서 시작한다. ‘시계태엽 우주’의 원리를 밝혀내 “인간이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을 영원히 변화시킨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천체의 운동 법칙’을 대중한테 알리려고 쓴 세계 최초의 과학소설(SF) ‘꿈’은 예기치 못한 피해자를 낳았다. 어머니 카타리나가 소설 속 한 장면으로 인해 마녀로 몰려 무고하게 희생된 것이다. 불학무식으로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삶을 떠올리며 케플러는 말한다. “천공을 아무리 뒤진다 해도 성별의 차이를 찾을 수 없다.”
차이가 생겨난 것은 지성이다. 남성과 여성의 지성 여부는 “이 세계가 결정한 사회적 위치”로부터 정해진 것이다. 재능은 본래 genius(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genius loci(장소의 정신)의 형태로 존재한다. 한 사람의 재능을 이룩하는 데에는 장소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성의 역사에는 어쩌다 주어진 가는 동아줄을 잡아당겨서 장소의 중력을 벗어난 인물들이 때때로 있다. 이 책은 이들의 삶에 언어의 횃불을 가까이 댄다.
정규 교육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혜성을 찾아낸 미국 최초의 여성 천문학자 마리아 미첼,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 오빠 프리드리히와 함께 대형 망원경을 제작하고 천왕성을 발견한 천문학자 캐롤라인 허셜, 여성 해방의 선구자이자 문학 비평가 마거릿 풀러, 조각가가 되려고 해부학을 공부하고 이탈리아로 무작정 건너간 해리엇 호스머, 짙은 고독 속에서 단련한 지성을 언어의 표면 위에 아름답게 새겨 넣은 시인 에밀리 디킨슨, 시적 과학 글쓰기를 발명해 인간이 아닌 바다 생물의 관점에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 해양 생물학자 레이철 카슨 등이 진리의 발견자로 얼굴을 드러낸다.
이 책의 서술은 독특하고 아름답다. 포포바는 한 인물의 삶을 선형적으로 복원하지 않는다. 마치 러시아 인형 상자처럼, 한 인물의 삶 속에서 다른 인물의 삶을 끝없이 열어나간다. 미첼이 한 언론 기고문에서 “각자 선택한 길에서 남자를 상대로 성공을 거둔 몇 안 되는 여성 천재”들로 과학자 메리 서머빌, 시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허셜을 꼽자, 언어의 물줄기를 갑자기 돌려서 그들 인생의 논에다 쏟아붓는 식이다. 서머빌은 최초의 과학자(scientist)로 불렸다. 모든 분야에 정통했기에 물리학자 등 분야 이름을 붙일 수도 없었고, 과학자를 가리키는 당시의 관용어구인 ‘과학의 남자(man of science)’로 불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남과 접속에 사랑이 없을 수 있으랴. 이 책에서 다룬 인물들은 대부분 퀴어다. 이 책은 이들의 연애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펼쳐낸다. 풀러는 한시도 사랑을 끊을 수 없었던 열정적인 양성애자였다. 미첼과 아이더 러셀, 호스머와 애시버트 부인, 디킨슨과 수전 길버트, 카슨과 도로시 프리먼 등의 아슬아슬한 사랑은 마음을 사로잡는다. 너새니얼 호손을 향한 허먼 멜빌의 열정적인 사랑, 영혼의 불멸을 믿는 듯 세상을 떠난 아내 알라인을 향해 말을 건네는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의 애절한 사랑 등도 재미를 더한다.
이로써 이 책은 수많은 이로 이뤄진 소수자들의 영웅전이자, 읽기의 그물망이 이룩한 거대한 지성사의 벽화가 된다. 진리추구라는 과학적 탐구의 역사가 수직으로 흘러내리고, 자연의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포착하려는 시적 모험의 역사가 수평으로 텍스트를 가로지르는 가운데, 여성이나 퀴어 같은 소수자들이 양자의 그물코에서 어떻게 찬란한 꽃을 피워 왔는지를 보여준다.
지식의 경계를 가리지 않고 좋은 책들을 스스로 꾸준히 읽어온 사람만이 감히 이런 책을 쓸 수 있다. “미로같이 복잡한 서가 사이를 걷고 있으면 아주 오래전에 읽은 방대하고 수없이 많은 책을 보고 있는 티끌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토끼처럼 생각이 우리 앞으로 튀어나오는 법이다.” 궁극의 독서는 생각의 그물로 이 토끼를 사냥하는 것이다. 이 책은 궁극의 독서가 이룩한 아름다운 흔적이다. 840쪽, 4만4000원.
장은수 이감문해력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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