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복 화백의 최신작인 ‘해녀 옥순삼춘’(177×227㎝, 장지에 아크릴, 2020). 제주에서는 아저씨, 아주머니, 이모 모두 ‘삼춘’으로 통한다.    인사아트센터 제공
이명복 화백의 최신작인 ‘해녀 옥순삼춘’(177×227㎝, 장지에 아크릴, 2020). 제주에서는 아저씨, 아주머니, 이모 모두 ‘삼춘’으로 통한다. 인사아트센터 제공

- ‘해녀 인물화’ 들고 돌아온 민중미술작가 이명복

인사아트센터 20일까지 전시
물질하거나 밭을 가는 여인들
‘건강한 노동’ 의 얼굴 그려내

‘赤·綠·靑’ 제주 풍경도 담아
“그림 속에 생명의 자국 만발”


“설문대가 어느 날 바다 한가운데에다 치마폭에 흙을 가득 퍼 나르기 시작했다. 치마에 난 구멍들 사이로 흙 부스러기가 조금씩 끊임없이 떨어졌다. 드디어 커다란 산이 하나 완성되었다. 어찌나 높은지 은하수를 만질 수 있을 만큼 높다고 해서 ‘한라산’이라 이름 지어졌다. 치마 구멍 사이로 떨어져 쌓인 흙들은 ‘오름’들이 되었다.”

제주에 전해 내려오는 설문대 할망 설화의 한 대목이다. 설문대 할망은 키가 크고 힘이 센 설화 속 제주 여성신으로 바다의 흙을 떠 제주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0년 2월 제주로 내려온 민중미술 작가 이명복(62) 화백이 3년여의 방황 끝에 제일 먼저 관심을 갖고 보게 된 것이 설문대 할망 설화였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식생으로 가득한 제주의 이국적 풍광도 멋있었지만, 제주 4·3 사건의 비극이 알게 모르게 대기를 짓누르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제주의 해녀들을 만났고, 강인한 여성상을 주목하며 캔버스에 그들의 모습을 옮기기 시작했다.

1982년 ‘임술년’ 동인을 결성, 6년여에 걸쳐 황재형, 이종구, 송창 등과 함께 ‘현실’에 대한 미술적 모색을 주도하며 민중미술 작가로 성가를 높였던 이명복 화백이 인사동에 기존 화풍과 조금 다른 ‘제주 여인 인물화’를 들고 나타났다. 인사아트센터에서 4일부터 20일까지 ‘삶’이란 타이틀로 이명복 개인전이 열린다. 전시장에서는 작가의 신작 흑백톤 대형 인물화인 해녀 연작을 중점적으로 선보인다. 적색과 녹색, 그리고 청색의 제주 풍경화도 접할 수 있다. 전시 작품은 모두 22점.

이명복 화백은 작품에 제주 여성에 대한 경외감을 담았다고 말했다.
이명복 화백은 작품에 제주 여성에 대한 경외감을 담았다고 말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해녀 옥순삼춘’(177×227㎝), ‘옥순씨 초상’(101×76㎝), ‘수원 해녀삼춘’(227×177㎝) 등의 초상부터 ‘삶-해녀’(103×73㎝) ‘가뭄’(94×73㎝), ‘늦가을’(105×72㎝) 등 100호에서 150호에 이르는 대형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려진 10여 점의 인물화.

잔주름이 가득한 70∼80대 노년기의 여인들이지만 모두 해녀복인 고무옷을 입고 물질을 위해 바다에 뛰어들거나, 콩을 털거나, 밭을 가는 등 무언가 열심히 ‘건강한 노동’에 매달려 있는 모습들이다. 얼굴을 클로즈업한 초상화 역시 잔주름이 가득하지만 눈가의 미소는 삶에 대한 의욕을 놓지 않고 있다.

“4·3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제주에서 강한 생활력으로 무장한 ‘가장’으로서 베풀면서도 위축되지 않고 살아가는 ‘신화 속 설문대 할망’ 같은 해녀들의 삶에 감동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잠방이’나 ‘고무옷’ 등 해녀복을 입고 물질을 위해 바다에 뛰어드는 제주 여인은 ‘무사’와도 같았습니다. ‘전투복’을 입고 ‘전장’에 뛰어드는 ‘전사’와 다름없었습니다. 엄숙한 기도 의식이 연상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미술평론가 김종길은 “이명복의 인물화는 회화적 형식이 극사실주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극사실적 실체에 주목했다”며 “‘머리카락 한 올 빠트리지 않고 다 그렸다’는 식의 묘사에 집중하지 않고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으로 깊게 파인 주름과 눈빛 등 제주의 자연이 극사실로 불어넣은 생명의 자국들로 만발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 작품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 제주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신작을 통해 제주 여성에 대한 경외감과 존경심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강함, 주변을 생각하는 가장으로서 여성의 삶… 조금 더 크게 해석하면 이분들이야말로 신화의 주인공이 아닐까요. 이분들이 제주를 지탱하는 것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전시를 기획한 인사아트 관계자는 “한국의 미술애호가들이 인물화를 선호하지 않아 인물화 대가(웨민쥔·岳敏君, 쩡판즈·曾梵志, 펑정제·俸正杰 등)가 풍부한 중국과 달리 국내에는 인물을 그리는 작가가 희귀한 현실에 비춰볼 때 이명복 화백의 작품은 국내 화단이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소중한 결실”이라고 말했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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