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원순(1937∼2005)

지금 스물한 살인 딸이 다섯 살일 때 돌아가셨으니, 벌써 햇수로 16년이 지났다. 아버지는 급성 췌장암 진단을 받은 후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 병원, 저 병원 검사를 받으러 모시고 다녔는데, 처음 진단한 의사의 말, “앞으로 두 달”이 적중했다. 정말 딱 두 달 만에 돌아가셨다.

병상에 계셨던 두 달간 밤낮으로 간병에 매달렸던 동생과 나는 아버지 건강에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 후회와 자책으로 괴로웠다. 그 두 달이 우리에겐 준비의 시간이 됐을까. 아버지의 장례는 마치 예정됐던 행사처럼 조용하게 치러졌다.

초상청에 앉아 우리 남매는 무슨 얘기를 했던가…. 산 사람이 주고받은 말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잊을 수 없는 것은 따로 있다. 묘하게도 코끝에 스치던 냄새다. 병상에서 맡았던 아버지 냄새가 초상청에 앉아 영정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 냄새에 나는 소 울음을 울었다. 아버지의 영혼이 우리 곁을 맴돌며 어깨를 다독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초봄에 돌아오는 아버지 기제사를 앞두고 제사 준비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을 때면 나는 늘 그 냄새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며칠 동안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지곤 한다. 주책없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기억들 때문에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화장실 출입이 잦아지긴 하지만, 한편으론 아련한 행복감에 젖기도 한다.

내가 열 살도 되기 전 일부터 돌아가시기 직전의 모습까지. 순서 없이 찾아오는 기억들은 마치 아버지가 살아계시기라도 한 것처럼 일상 속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구구단을 못 외워 머리를 쥐어박히며 야단맞던 기억, 이야기하면서 웃음을 못 참고 제풀에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나에게 차분하게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타이르시던 일, 설날을 앞두고 생일을 맞는 내가 제대로 생일 밥을 못 얻어먹는다고 일부러 커다란 생일케이크를 사 들고 오셨던 것 등.

물론 그 기억 속에서 가슴을 콕콕 찌르는 마음 아픈 것들도 있다. 간성혼수로 치매 증세를 보이던 아버지는 휠체어에 앉기만 하면 병원 안을 그렇게 돌아다니자고 하셨다. 평생 운전대를 놓지 않았던 직업 탓이었던지 “오른쪽, 왼쪽, 이리로, 저리로” 하면서 간병하는 우리 혼을 쏙 빼놓으셨다. 죽음을 예감했는지 “이제 쓰러지면 못 일어날 것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보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리시던 아버지, 아예 눈조차 못 뜨면서 누가 병문안 오는 기척에는 “그래, 왔구나!” 반기시던 모습.

단편적인 그런 기억 중에 유훈처럼 떠오르는 아버지 말씀이 있다. “무슨 일이든 끝이 있게 마련이다. 참아봐라. 괜찮아진다.” 사춘기를 겪으며 방문, 창문을 담요로 가리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때, 결혼생활이 힘들어 친정에 달려가 하소연할 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은행 문턱을 매일같이 드나들 때, 늘 그 말씀을 하셨다.

나이가 들면서 이제 내가 내 자식에게 그 말을 한다. 모든 일이 끝이 있으므로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언젠가 저 혼자 서야 할 때 견딜 힘을 주길 바라면서.

그리고 정말 잊고 싶지 않은 아버지 모습이 있다. 늦가을 부드러운 햇살이 드리운 마당에서 엄마와 함께 메주를 만들던 기억이다. 생업을 내려놓고 밭농사를 지으며 꿈같은 전원생활을 하실 때다. 삶은 메주콩 자루를 메주 틀에 부어 넣고 발로 밟으며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메주로 띄운 장을 맛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시던 그때의 아버지를 절대 잊고 싶지 않다. 살면서 가끔 휘청거릴 때마다 아버지의 위로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버지 병상의 냄새로, 끝이 있으니 참아보라는 목소리로, 행복하다고 웃으시던 그 모습으로 나는 위로를 삼는다. 너무너무 보고 싶고 그립다.

딸 황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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