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개봉한 영화 ‘왕의 남자’는 조선 연산군 시대 궁중 광대들의 희로애락을 그려 10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배우 정진영(왼쪽)이 광기 어린 연산군 역을 맡았다.
2005년 개봉한 영화 ‘왕의 남자’는 조선 연산군 시대 궁중 광대들의 희로애락을 그려 10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배우 정진영(왼쪽)이 광기 어린 연산군 역을 맡았다.

박현모의 한국형 소통이야기 - ⑦ ‘질투하는 군주’ 연산군

■ 역사인물학

선왕 성종 말기, 비대해진 언관 탓 왕권 위축 …어린 왕세자에게 나쁜 기억 심어
신하 말 거슬리면 ‘왕 능멸한다’ 간주…‘손바닥 뚫기’등 형벌로 입 막아


실록을 읽어갈수록 연산군(1494∼1506년 재위)의 얼굴에서 점점 또렷이 드러나는 것은 부왕 성종이었다. 그동안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피’ 등에서 묘사된 연산군은 어머니의 비극적 죽음에 사로잡힌 인물이었다. 어머니 폐비(廢妃) 윤 씨의 불행한 죽음을 뒤늦게 알게 된 연산군이 심리적으로 방황하다가 정치적 파탄으로 끝났다는 스토리가 그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연산군일기’의 기록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연산군이 쫓겨나던 1506년 9월 2일의 실록은 왕의 어머니 폐비 윤 씨의 못된 성질로 시작된다. 윤 씨는 성질이 사납고 삐뚤어졌으며 질투가 심했는데(悍戾妬忌) 그 아들 역시 어미를 빼닮았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연산군일기’ 12년간의 기록에 묘사된 왕의 모습은 사납고 삐뚤어졌으며 질투가 심한 혼군(昏君) 그 자체였다. 신하들의 말이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연산군은 ‘위를 범한다(屬上)’ 또는 ‘왕을 능멸한다(陵上)’고 간주해 가두고 고문하고 유배를 보냈다는 게 사관의 말이다. 손바닥 뚫기(穿掌), 단근질하기(烙訊), 가슴빠개기(胸),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碎骨飄風) 등 이름조차 끔찍한 형벌로 언로를 틀어막았다고 기록돼 있다.

연산군은 또한 삐뚤어진 왕이었다. 부왕 성종이 사망했을 때 서러워하기는커녕 궁궐 후원의 사슴을 쏴 죽인 다음 그 고기를 먹었다. 부왕의 영정을 손으로 때리기도 했다. 신하들이 ‘세종과 성종처럼 정치를 하시라’고 하면 “나는 어진 임금이 못 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비꼬았다. 왕이나 대신을 비판하는 언관에게는 그의 약점을 지적하면서 “너 자신이 옳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느냐(自爲不正 其能正人乎)”며 반박했다. 사관에 따르면 “연산군은 성종에 대해서 모든 일을 반드시 반대로 했는데, 특히 말년(末年)이 되면서 부왕을 원수같이 봤다(視成宗如讐仇)”고 한다. 연산군의 얼굴에 짙게 드리워진 성종의 그늘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연산군일기’ 전체를 통틀어 두드러진 모습은 ‘질투하는 군주’다. 연산군은 종종 시를 지어 내리면서 신하들에게 답시(答詩)를 지어 올리라고 요구했는데, 왕보다 더 많은 시를 지어 올린 사람은 처벌받았다. 재위 중반에 두 개의 시를 지어 올린 신하에게 “한 수만 지으라고 했는데 두 수를 지었다”면서 국문하게 한 것이 그 예다.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는 오로지 왕 한 사람에게만 봉사해야 했다. 기혼과 미혼을 막론하고 왕 외의 남자와 만나 임신하거나 출산하는 것은 엄금됐다. 비밀리에 만나 부부의 정을 나눈 운평 소진주와 그의 남편은 능지처사(陵遲處死)됐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의 묘. 앞에서 봤을 때 왼쪽이 연산군, 오른쪽은 폐위된 왕비 거창군부인 신 씨의 묘다. 사적 제362호로 지정돼 있다.  문화재청 제공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의 묘. 앞에서 봤을 때 왼쪽이 연산군, 오른쪽은 폐위된 왕비 거창군부인 신 씨의 묘다. 사적 제362호로 지정돼 있다. 문화재청 제공

연산군의 가장 큰 질투의 대상은 언관들이었다. 그는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신하들을 극도로 싫어했다. 선왕인 성종이 간언을 너그럽게 받아들였다는 언관의 발언에 대해서 그는 “선왕께서 유생을 죄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능상(陵上)의 풍습이 생겨났다”면서, “하는 일마다 의견을 수렴해서 처리한다면 임금의 권한이 어디에 있겠는가”(연산군일기 1/1/30) 라고 받아쳤다. 왕의 인사조치를 거론하면 “지금 권력이 위에 있지 않고 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에 있다”면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원인은 권력이 아래로 옮겨가는 데 있다”고 대응했다.

당시 언관의 ‘기어코 이기려 드는(期於得勝)’ 풍토는 왕뿐만 아니라 대신들에 의해서도 지적됐다. “근래 선비들의 습속이 날로 잘못돼 고자질하는 것을 정직하다고 여기고 윗사람을 능멸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며, 일의 경중과 대소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말만을 성현의 경전으로 여겨 이기는 데만 힘쓰고 있다”는 영의정 노사신의 말이 그것이다(연산군일기 1/7/19). 연산군은 노사신의 말이 시속의 폐단을 정확히 짚은 것이라며 오로지 말만 하고 일은 하지 않는 풍토가 “장차 나라를 그르칠 조짐”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당시 왕과 대신들은 출노입주(出奴入主), 즉 자기편은 무조건 옳고 다른 편은 사악한 것으로 매도하는 패거리 문화가 나랏일을 망치는 주범이라고 봤다. “지금 세상을 보면 위를 업신여기는 풍습(陵上之風)이 있어 아랫사람들이 한갓 서로 동류(同類)들을 비호하기만 하고, 10분 중 1분도 국가를 돌아보며 생각하는 일이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현실의 폐단은 진언하지 않고 자기들의 관심사만 얘기한다”는 기록이나, “요즘 위에서 하는 일이라면 기어이 이기려고 해서 쟁론이 끝이 없다”(연산군일기 9/8/24, 9/3/16)는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한마디로 각자가 맡은 일은 방치한 채 누가 어느 자리에 배치되는지에만 관심을 쏟고, 반대편의 허점을 찾아 공격하기에 바쁜 이른바 ‘망국에 이르는 병’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게 당시 사람들의 시대 진단이었다.

그런데 연산군시대의 ‘망국에 이르는 병’은 성종시대의 유산이기도 했다. 성종은 그동안 ‘경국대전’을 완성해 반포하고, 훈신(勳臣)들의 토지 세습과 관리들의 수탈을 막기 위해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는 한편, 두 차례에 걸친 야인 정벌 등으로 조선왕조의 체제를 완성한 군주로 평가된다. 그것은 경연에 성실히 참석해 인재의 말을 귀하게 듣는 왕의 자세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대는 계유정난 이후 여러 차례의 정변을 거치면서 기득세력화한 훈신들의 힘이 비대해졌고, 다른 한편 언관들의 이기려는(得勝) 풍토로 인해 국정운영의 효과성이 크게 떨어진 시기기도 했다. 특히 재위 말기에 들어서 ‘망국에 이르는 병’이 심해졌는데, 그 당시 김종직은 성종시대를 일컬어 “무언가 나랏일을 시도하기가 어려운 병든 때”라고 했다. 권력을 이용해 막대한 재산을 형성한 훈신들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성종과 연산군 시대를 살았던 윤필상은 국가 전체 일 년 수입의 4.5%를 소유했다는 분석이 그것이다(김범, ‘연산군’ 247쪽). 말하자면 왕(연산군)이 나라 창고를 자기 재산처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신하들이 쉽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성종이 연산군에게 남긴 부정적 유산은 그 외에도 많았다. 폐비 윤 씨 사건, 즉 자신의 어머니를 폐위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사건은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언관의 힘을 지나치게 키운 것도 연산군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유산이었다. 특히 성종 때 신하들이 왕의 정통성 문제를 시비할 정도로 비대해진 언관은 심각한 것으로 인식됐다. 재위 후반에 임사홍-연산군 때 갑자사화의 주역이 되는-을 등용하려는 성종에게 언관들이 “전하께서는 곁가지(旁支)로서 대통(大統)을 이어받았다”면서 도전적인 발언을 한 것이 그 한 예다(성종실록 19/11/30). 적장자가 아닌 사람이 군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신하들의 말을 순순히 따라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왕권이 위축돼 있던 것이다. 이런 일들을 지켜봤던 연산군으로서는 권력이 아래에 있는 것을 무엇보다 위태로운 상황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성종이 물려준 가장 나쁜 유산은 나라 살림을 사사롭게 쓰는 왕실의 풍조였다. 훈신들의 요직 장악과 거대 재산의 형성은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불만을 키웠거니와, 성종이 즉위 초년에 추진한 경제개혁의 중단은 민심을 실망시켰다. 내수사(內需司)라 불리는 궁중 관청의 혁파와 복구가 그 예다. 백성들에게 연 30∼50%에 이르는 고리대 사채를 통해 재산을 증식해 “백성들과 더불어 이익을 다툰다”고 비판받던 내수사를 성종은 재위 3년에 상당 부분 혁파했다가 호조관리의 요청을 받아들여 폐지한 지 10년 만에 다시 부활시켰다. 왕실 비용 충당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정당화됐지만, 이는 연산군으로 하여금 연회와 선물 공세를 위해 빈번히 나라 창고를 열게 하는 빌미를 줬다.

성종 말기의 국정난맥에 실망한 많은 사람이 젊은 왕 연산군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은 자연스러웠다. 뒤의 선조 즉위 초년과 비슷하게 언론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를 중심으로 한 언관들은 11년간이나 왕세자 교육을 받은 젊은 군주를 성리학적인 임금으로 이끌어가려 했다. 성종 장례에 불교 예법인 수륙재를 막기 위해 언관들은 물론이고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선 것이나, 외척의 임용을 1년 가까이나 반대한 것이 그 예다. 갓 즉위한 연산군에게 경연에 나오라고 집요하게 요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성종보다 더 유교적인 군주로 이끌어 가려는 언관들의 노력은 좌절됐다. 그러기에는 연산군이 부왕 성종으로부터 물려받은 어두운 유산이 깊었고, 군신 간 시대진단의 괴리가 너무 컸다.

‘성종실록’을 덮는데 문득 세자시절 연산군의 공부 얘기가 눈길을 끌었다. 연산군이 17세가 되는 1492년(성종23년)에 성종은 “세자가 문리를 이해하지 못한다(未解文理)”고 지적했다. 옆에 있던 승지 역시 그 지적에 공감하며 함께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문종과 더불어 최장기 왕세자 교육을 받았고, 100여 수가 넘는 시(詩)를 썼던 연산군이 ‘문리 불통’의 지적을 받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에 대해 어떤 연구자는 ‘개별적 사실들의 인과관계나 맥락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의 부족’으로 해석했다(김범, ‘연산군’ 2010, 90쪽). 하지만 이 해석은 너무 범범해서 연산군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연산군 스승들의 언급, 즉 ‘질문하지 않는 태도’다. “세자는 강의를 들을 때 적극적으로 질문해 변론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것이다. 나는 그것이 연산군 재위 후반부에 쏟아지는 일방적인 전교(傳敎)들과 신하들의 무성의한 반응, 그리고 사사롭게 취해지는 인사조치와 나라 곳간 열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질문하지 않고, 그래서 문리가 통하지 않은 연산군의 정치 모습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살핀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 용어설명

언론삼사 : 조선시대의 대표적 언론기관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가리킨다. 이 중에서 사헌부와 사간원은 대간(臺諫)이라 해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기관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사헌부는 백관에 대한 규찰, 풍속을 바로잡는 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펴주는 일 등을 담당했고(요즘의 검찰청 역할), 사간원은 국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담당했다. 그리고 홍문관은 궁중의 책을 관리하고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일을 하는 기관인데, 세종 때의 집현전의 후신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이들 언론삼사는 성종과 연산군시대에 이르러 언론의 중심 기관으로 왕의 언행에 대한 비판과 견제 역할을 활발히 했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