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무리 좌담회

[좌담자]
김환석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
임소연 숙대 글로벌거버넌스硏 연구교수
정찬철 한국외대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기술학 연구자 브뤼노 라투르를 시작으로 지난해 9월부터 매주 연재된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시리즈가 지난 3일 미국의 철학자이자 정치 이론가인 제인 베넷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현대 과학과 인문학의 프레임을 바꾸고 ‘존재론적 전회(轉回)’라고 할 만한 새로운 사유를 시도하는, 총 25명의 사상가를 국내 23명의 연구자들이 처음 체계적으로 소개한 ‘최전선’ 시리즈는 학계는 물론, 문화·예술·출판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연재에 참여한 김환석(국민대 사회학과 교수), 임소연(숙명여대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 연구교수), 정찬철(한국외대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 등 세 연구자의 좌담을 싣는다. 당초 지난달 24일 문화일보에서 예정됐던 좌담은 당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짧지 않은 거리를 대중교통으로 이동해야 할 좌담 패널들을 고려해 이메일 좌담으로 바뀌었다. ‘최전선’ 시리즈에 소개된 사상 대부분이 자연 파괴와 신종 전염병의 등장 등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의 위기에서 등장한 사유라는 점에서 당일 좌담 형식의 갑작스러운 변경은 상징적이기도 했다.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을 관통하는 사상은 ‘신유물론’, 즉 ‘자연/사회’ ‘비인간/인간’의 이분법을 넘어서 사유하는 것입니다. 김환석 교수께서 먼저 그러한 사유들이 나오게 된 배경을 다시 정리해주십시오.

△김환석(이하 ‘김’) = 1990년대부터 지구적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에 대한 인류 차원의 각성이 대두하면서 21세기부터는 드디어 이러한 지구적 변화를 ‘인류세’라고 부르며 연구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자연과학부터 인문·사회과학 및 예술에 걸쳐 패러다임 변화라 부를 만한 폭넓은 지적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지적 흐름에서는 과거 약 300년 동안 서구 주도로 이뤄져 왔던 근대주의 사상과 그에 기초한 사회변화가 인간/비인간, 정신/물질의 이원론을 토대로 인간중심주의를 추구한 결과, 이러한 ‘인류세’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대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이원론과 인간중심주의 대신에 일원론과 탈인간중심주의를 모색하고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절박한 문제의식이 21세기 사상의 특징을 이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임소연 교수는 페미니즘, 정찬철 교수는 미디어 고고학의 측면에서 위의 질문에 답하신다면.

△임소연(이하 ‘임’) = 저는 페미니즘에서의 신유물론적 사유를 한 마디로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 도나 해러웨이가 1980년대 중반에 ‘사이보그 선언문’을 통해서 보여준 사이보그의 ‘부활’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보통 사이보그를 인간과 비인간 혹은 자연과 문화의 범주를 초월하는 존재 그래서 해방적인 주체의 상징처럼 알고 있는데, 사실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며 절대로 선하고 순수한 존재도 아닙니다. 다만 자연과 물질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뒤섞이고 연결될 수 있기에 희망이 있다는 정도죠. 제가 사이보그의 ‘부활’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지금까지 사이보그의 물질성이 잊어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신유물론과 함께 비로소 사이보그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가능해진 거죠. 최근 페미니즘에서 물질로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이론(ANT)’의 영향이 컸습니다.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ANT에 관심을 가지면서 해러웨이의 작업이 다시 중요한 연결점이 되었습니다.

△정찬철(이하 ‘정’) =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미디어 고고학은 미셸 푸코의 인간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의 연장이자 극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푸코는 특정 시대를 규정하는 담론의 존재 양태의 변화를 탐구하는 방법론을 ‘고고학’이라고 부릅니다. 독일 미디어 이론가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푸코가 문화적 혹은 정치적 제도가 어떠한 미디어 기술을 통해 지식을 생산하고, 전달하고, 실천하는지를 파헤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키틀러가 ‘기록시스템 1800·1900’(1985)과 ‘축음기, 영화, 타자기’(1986) 등의 대표 저작에서 착수했던 작업이 바로 지식을 기록하고, 저장하고, 전달하는 미디어 기술이 담론의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였습니다. 이후 그 영향을 받은 독일의 미디어 연구자인 지크프리트 칠린스키와 볼프강 에른스트 등은 미디어가 전달하는 내용이 아닌 미디어를 구성하는 물질성과 그 변화 과정을 파헤치고 미디어 기술의 변화, 즉 미디어가 지식을 기록, 저장, 전달하는 방식의 변화가 대상에 대한 새로운 지식의 등장과 우리의 기억 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묻습니다. 이 내용을 ‘인간/비인간’의 도식에 넣어 간략히 설명하자면, 그동안 인간의 역사에 가려져 있었던 미디어의 존재론적 위상을 발굴해 미디어를 다시 본래 역사의 중심에 되돌려 놓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근래 기상이변,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신종 인플루엔자에 이은 코로나19 사태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코로나19’와 ‘최전선’에서 다뤄진 주제는 무관하지 않지요?

△김 = 코로나19 사태는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닙니다. 21세기 들어 점점 빈번해지는 인수공통 전염병의 등장은 야생동물에서 출현한 새로운 바이러스가 인간들에게 감염돼 전 세계로 확산, 사회경제적 충격과 변화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1980년대부터 서구 주도로 전 세계가 추진해온 ‘지구화’와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원론과 인간중심주의에 따라 지구화가 인간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확대해 풍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만 기대했지, 그 지구화의 네트워크를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게 바이러스도 함께 전파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지구화나 경제성장을 추구할 때 항상 그런 변화는 인간 관계에서뿐만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관계의 변화도 가져온다는 것을 유념해야 하며, 이때 비인간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세심하게 살펴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코로나19 같은 인수공통 전염병의 경우, 특히 우리는 야생동물과의 기존 관계가 바람직했는가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임 = 무관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죠. 코로나19라고 이름 붙인,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 도시의 일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 목격하고 있지 않나요. 코로나19는 그야말로 인간과 비인간, 몸과 환경,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을 넘나들어 실재하는 존재이고 새로운 연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위기 속에서 우리가 보지 않으려 했던 사회적 약자나 집단의 실재와 직면하게 되기도 하고요. 바이러스뿐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도 새로 배워야 합니다. ‘최전선’에서 다룬 많은 주제가 결국 다양한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독자의 반응 중 가장 많았던 게, 그 같은 ‘인간/비인간’의 이분법을 넘는 사유와 인식의 전환을 통해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떤 실천을 할 수 있고 어떤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윤리’의 질문이었습니다. 지난 세기 마르크스적 실험과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에 경도돼 봤지만, 세상은 더욱 나빠지기만 했다는 좌절과 조급증이 묻어나는 질문이긴 합니다.

△김 = 20세기를 지배했던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각각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결국 이원론과 인간중심주의를 지속하고 강화하는 한계를 지녔다고 봅니다. 21세기 사상은 더 이상 지구를 인간의 정신이 지배해야 할 비인간 물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일부를 이루면서 비인간과 함께 형성하는 공동세계이자 바람직한 공동세계를 실현해나갈 공생의 정치와 윤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임 = 질문에 답이 이미 있네요. 좌절하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고! 이분법을 넘는 사유와 인식이 바로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면 그건 물질로의 전환이 덜 된 것이라고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번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이번 시리즈에 등장한 많은 사상가의 목소리였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죽을 때까지 실천하고 여기저기 조금씩 바꿔가는 거죠. 저는 개인적으로 신유물론 사상을 접하면서,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엉망진창이고, 내 마음대로, 인간의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사실 이런 깨달음이 이분법으로 유지되는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는 좌절스럽겠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 자체로도 해방적이고 위안이 되는 측면이 있을 듯합니다. 저만 그런가요?

△정 = “과연 미디어 고고학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보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타자기는 손글씨에 담긴 남성성과 여성성을 지워버림으로써 여성 작가의 탄생을 이끌었고, 타자기는 철학가나 소설가 옆에서 그들의 말을 옮겨 적는 필사가의 성별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꾸었습니다. 여성이 타자기의 작은 자판을 정확하게 치는 데 적합한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성에 대한 문자 교육의 필요성이 증대되는 시기로 이어집니다. 이렇듯 미디어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가 새롭게 펼쳐집니다. 이러한 점이, 미디어는 인간 능력의 연장이라는 기존의 미디어에 대한 인간중심적인 사유를 넘어서는 미디어 고고학의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번 시리즈는 불가피하게 대부분 서구 학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시리즈의 주제가 지구적 보편성을 지녔음에도 독자들이 피부에 닿게 느끼지 못하는 듯도 합니다. 앞 항목의 질문을 ‘지금 현재 한반도 남쪽’으로 좁혀 본다면 어떨까요.


“사상 새 흐름, 문화 전반 변화 유도하고 우리 사회 지적 자극제 될 것”

“기후변화·인수공통전염병 등
근대화가 초래한 위기겪는 韓
탈인간 중심 생태화 모색해야”

“초연결·지능화하는 4차 혁명
인간-비인간 가까워진다지만
없던 존재가 나타나는것 아냐”


△김 = 한국이야말로 서구를 따라 ‘근대화’를 국가의 지상목표로 수용했고 그 결과 제3세계 중 드물게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성공했기 때문에, 근대화의 저변에 깔린 이원론과 인간중심주의를 의심의 여지 없는 당연한 상식으로 여겨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은 서구보다 더 기후변화, 미세먼지, 인수공통 전염병, 동물학대, 쓰레기 문제 등 인간중심적 근대화가 초래한 위험과 생태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도 이러한 문제들의 심층적 원인을 이해하고 그 대안으로서 탈인간중심적 생태화를 모색하는 데있어 21세기 사상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임 =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이미 물질에 기반해 변화해 온 것 같습니다. 젊은 여성들의 페미니즘이 대표적으로 그렇습니다. 기성 페미니즘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지식과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경험의 문제, 존재론적 차이겠죠. 인류세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인류세 담론을 ‘서구 백인 남성의 반성문’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그 반성문을 그대로 이름만 바꿔서 낼 수는 없죠. 우리만의 반성문을 쓰는 것이 연구자들, 학자들의 임무일 테지요.

△정 = 원론적인 얘기 같습니다만, 우리에게 이러한 이론을 적용하거나 응용·해석할 수 있는 독자적인 텍스트가 필요합니다. 이론이야 얼마든지 이해하고 소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이나 주장이 출현한 텍스트는 우리의 역사와 다르기에 여전히 멀게 느껴지거나 지속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한국적 맥락에서 재사유될 때 비로소 이론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연구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최전선’ 시리즈에서 다뤄진 학자나 사유에 대해 우리 학계는 어느 정도 따라잡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 = 최근 우리 학계에서도 다행히 점점 관심은 높아지고 있습니다. 21세기 사상의 선구자 역할을 한 앨프리드 화이트헤드, 질 들뢰즈, 라투르, 해러웨이 등에 대해서는 이미 1990년대부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온 국내 학자들이 있었지만, 과거에는 분야별로 각각 산발적인 관심이었거나 또 이것이 국내 현실에 뿌리내린 경험적 연구로 발전하지도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난 약 5년 동안 국내 학계에서도 새로운 학문적 패러다임을 수용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학을 횡단하는 학제적 공동연구 모임이 탄생하고 있고 또 국내 현실에 적용 가능한 경험적 연구로 발전시키려는 노력도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임 = 저는 좀 다르게 봅니다. 개별 연구자들의 차원에서 보면 분명 새로운 이론이나 패러다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자신의 연구에 접목하려는 이들이 있죠. 특히 학생들과 젊은 연구자들이 아무래도 민감할 수밖에 없고요. 반면 학계에 자리를 잡은 분들은 교육과 연구의 핵심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새로운 사유에 닫혀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학계의 차원에서 잘 따라가고 있느냐 하면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정 = 우리 학계에서는 엄밀히 말해 미디어 이론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적이 없습니다. 미디어에 대한 연구는 주로 미디어가 전달하는 콘텐츠의 문화사적 영향에 대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현재 유럽 및 영미권에서는 미디어 이론에 대한 연구가 굉장히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디지털 문화 속 우리 삶의 양태적 기원 및 미래를 파악하는 데 있어 미디어 고고학은 21세기 디지털 인문학의 핵심 분과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학문적 관심의 잠재력은 높다고 봅니다.

―‘최전선’ 시리즈에서 다뤄진 주제들이 앞으로 우리의 학계나 출판, 예술, 대중문화에서도 연구되고 변화를 줄 것이라는 건 시간의 문제로 봅니다. 어떤 변화에 대한 기대를 해볼 수 있을까요.

△김 = 21세기 사상은 이미 서구에서는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떠오른 새로운 사상이기 때문에, 앞으로 국내 학계는 물론이고 출판, 예술, 대중문화에서 큰 관심을 받으며 지적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아마 이번의 문화일보 연재가 그런 계기를 마련하는 좋은 자극제가 되지 않았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서구에서 수입된 또 한 번의 지적 유행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를 우리 현실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소화하고 실제의 경험적 연구로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현실적 문제, 예컨대 코로나19 사태, 인류세 등의 해결방안을 탈인간중심주의적 관점에서 제공하려는 우리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노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학계의 개방적 자세와 정부 및 언론의 관심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네요.

△임 = 우선 학계의 가시적인 변화는 커리큘럼을 바꾸고 학생의 연구를 지도하고 학위를 주는 힘을 가진 교수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첨단 이론의 소개는 학계보다는 번역서 시장에서 먼저 이루어지니 앞으로 이런 주제의 책들이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예술계는 자연, 기계, 물질을 늘 다루던 분야이니 말할 것도 없고요. 저는 무엇보다 학계 밖에서 연구자-예술가-출판시장이 새롭고 다양한 연합을 이루어 이 변화를 주도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 = 네, 그럼요. 특히 미디어 고고학은 그동안 영화학, 역사학, 미디어문화사, 테크놀로지,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학제 및 개념과 비판적 논의를 거치면서 하나의 학문 영역으로 발전했습니다. 따라서 그만큼 다양한 영역들과 교류할 측면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미디어아트 작품이나 최근의 인공지능(AI) 예술 혹은 소프트웨어 아트 작품의 의미 등을 비평하고,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일원적 관계 등을 논하는 데 미디어 고고학이 중요한 이론 혹은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신유물론이 더 적확하게 세계를 보는 관점을 열어줄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임 = 4차 산업혁명은 초연결과 초지능의 시대라는 말이 맞는다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는 존재 혹은 포스트휴먼, 트랜스휴먼, 사이보그, 하이브리드 등이 등장하고 인간과 인간이 아닌 다양한 존재들이 더 많이, 더 가깝게 연결된다는 것인데, 정말 신유물론에 딱 들어맞지 않나요?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왔으니 신유물론으로 세계를 보는 게 맞는다는 말은 아니고요.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화 등등 두 개의 범주로 ‘퉁칠 수 없다’는 것은 4차 산업혁명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원래 그랬던 것인데, 4차 산업혁명이 오면 둘로 나눠진 것들이 갑자기 마구 합쳐지고 전에 없던 존재들이 나타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게 문제죠. 그렇게 해야 이득을 얻는 이들이 있으니까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신유물론은 4차 산업혁명을 과하게 두려워하거나 과하게 반기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데에 유용할 것 같습니다.

△정 = 적어도 4차 산업혁명이 인간의 기술을 통한 자연의 지배가 아닌, 기술을 통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인간중심적인 사유체계에서 벗어나자’라는 모토로 출현한 신유물론은 분명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철학적 준거 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날 신산업 영역으로 등장하고 있는 AI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는 미디어 고고학이 담당해야 하는 중요한 영역이라 봅니다. AI에 대한 인류의 열망과 실패의 역사, 혹은 오래전부터 있어 온 AI 개발을 위한 기술적 시도에 담겨진 ‘시대의 질서’를 파헤치는 고고학적 연구는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AI에 대한 욕망의 근원을 알려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판단합니다.

―신유물론 등 새로운 사상에 대해 제기되는 비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김 = 신유물론은 새로운 패러다임이기 때문에 기존의 패러다임들인 실증주의, 사회구성주의, 마르크스주의 모두로부터 공격과 견제를 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신유물론은 비인간 사물을 ‘물신화(fetishism)’하는 오류에 빠져 있다” “신유물론은 정치적으로 무력하다” 등등의 비판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판들은 대부분 신유물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거나, 또는 여전히 이원론과 인간중심주의라는 근대주의적 편향을 고수하려는 낡은 관성 때문이라고 판단됩니다.

△임 = 신유물론은 하나의 관점이나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일종의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론적 논쟁으로 신유물론이 옳은지 아닌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이번 문화일보 시리즈를 통해서 더 많은 분이 신유물론을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기를 바랍니다.

△정 = 미디어 기술이 역사를 결정한다는 입장은 인간의 위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술과 연결된 인간·기술 연합체로 대체됐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창조적 역할을 역사에서 지워버렸다는 식의 비판은 다소 전체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비판입니다. 이러한 비판은 오히려 그만큼 우리의 역사 인식이 인간중심적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 용어설명

신유물론(New Materialism) : 인간이 발생시킨 전 지구적 기후변화 등으로 환경위기 담론이 종착점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자 2000년대 초부터 서구의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 긴급히 제기된 것이 ‘인류세’이다. ‘신유물론’은 바로 ‘인류세’의 극복을 위한 학문적 패러다임으로, “인류세와 함께 신유물론이 도착했다”고 말해진다. 서구 사상을 지금까지 지배해온 자연과 인간, 사물과 생명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자연, 공간, 인공물, 기술 등 비인간 사물들도 사회의 핵심적 구성 요소로 파악하는 ‘존재론적 전환’이 ‘신유물론’이다.

‘행위자-연결망 이론(ANT·Actor-Network Theory)’ : 신유물론을 구성하는 대표적 이론이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기술학 연구자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이론’이다. 현재 인류가 처한 에너지 위기, 식품과 농업 위기, 쓰레기 대란, 동물 문제, 전염병의 지구적 확산, ‘4차 산업혁명’의 변혁 등은 더 이상 자연/사회, 비인간/인간의 근대적 이분법에 기초를 두어서는 제대로 이해하거나 처방을 내릴 수 없는 ‘하이브리드적’ 현상들이다. ANT는 인간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 즉 이질적 연결망이라는 논지를 편다.


■ 다음은 ‘과학의 최전선’

문화일보는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의 후속으로 ‘21세기 과학의 최전선’(가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기초과학과 응용과학, 생명과학기술, 기후, 농업,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현대과학과 기술의 첨단에서 어떤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지를 전문 연구자들을 통해 탐색해 나갈 예정입니다.

정리=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관련기사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