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송재우 기자 jaewoo@
일러스트 = 송재우 기자 jaewoo@

■ 인지심리학

김민식의 과학으로 본 마음 - ⑦ 기억과 정서

우울할 때 부정적 일들 더 잘 떠오르듯 기억은 ‘당시 정서상태 + 부정·긍정정도’ 일치 여부가 좌우
아픈 기억 빨리 잊는 ‘긍정적 편향’은 좋지만, 실패 계속 반복하는 실수 범하기도


기억이 없다면, 자신이 누구고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할 수 없다. 정보를 저장하고 사용하는 기억 능력은 인간의 마음과 인지 기능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인간의 마음’ 하면 기억에 의존한 자신의 정체감을 먼저 떠올리고, 치매 증상 중에서도 기억 능력의 상실을 제일 먼저 두려워한다.

많은 사람이 인간의 마음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은 바로 ‘정서’다. 즉,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두려운, 이런 감정들이야말로 마음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뇌의 편도체라고 하는 작은 영역이 우리의 정서적 반응을 관장하고 있지만, 동물에게는 이러한 정서적 반응들이 어떤 행동을 계속 추구할지 혹은 줄이거나 회피할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기억과 마찬가지로 정서 역시 우리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다.

정서는 우리가 보고 듣고 기억하고 판단하는 인지 기능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 또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즉, 정서와 인지는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있다. 기억과 정서 간의 관계에 대해 그동안 많은 인지심리학자가 다양한 연구를 수행했고 중요한 경험적 연구결과들을 보고해 왔다. 그중 세 가지 주요 발견을 요약,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발견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기분 좋은 일과 기분 나쁜 일 중 어떤 일을 더 잘 기억하는가? 즉, 우리는 정서적으로 긍정적인 기억과 부정적인 기억 중 어떤 기억을 더 잘하는지, 이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많은 연구가 수행됐다. 당신은 어떤 기억을 잘한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사람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평균적으로 우리는 긍정적인 기억을 부정적인 기억보다 조금 더 잘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 지난 한 달 동안 좋은 일이 10번, 나쁜 일이 10번 있었다고 할 때 우리는 그중에서 좋은 일을 좀 더 잘 기억하고, 좋은 일이 좀 더 많이 있었다고 회상할 가능성이 크다. 일종의 기억의 긍정적 편향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부분 사람에게 과거의 정서적 사건들(아주 긍정적인 일부터 아주 부정적인 일까지)에 대해 그것이 얼마나 긍정적 혹은 부정적이었는지를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평가하게 하면, 그 당시 느꼈던 긍정적 혹은 부정적 정서의 강도는 일반적으로 줄어든다. 하지만 그 줄어드는 정도가 긍정적인 사건보다 부정적인 사건에서 훨씬 더 크게 나타난다. 가령, 지난달의 좋았던 사건을 떠올릴 때는 당시 느꼈던 것보다 긍정적 정서의 강도가 약간 줄어드는 반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부정적인 사건의 경우는 당시 느꼈던 부정적 정서의 강도보다 훨씬 덜 부정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실제로 2003년 콜로라도주립대 심리학자들이 수행한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우울 성향을 지닌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 두 집단을 대상으로 각자 자신에게 일어난 정서적 사건들을 회상하게 했고, 그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정서적 강도와 현재 회상 시점에서의 정서적 강도를 보고하게 했다. 측정 결과, 우울 성향이 없는 학생들의 경우 유쾌한 사건은 당시 느꼈던 긍정적 느낌에서 약간 줄어들고 불쾌한 감정은 훨씬 더 크게 줄어드는 경향(이를 긍정성 효과라 부른다)을 보인 반면, 우울 성향을 지닌 학생들의 경우는 이러한 긍정성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유쾌한 일이나 불쾌한 일 모두에서 중간 정도의 비슷한 정서적 감소만이 나타났다. 즉, 우울 성향이 없는 집단에 비해 우울 성향을 지닌 학생들은 즐거웠던 일에 대한 긍정적 감정은 훨씬 더 많이 줄어들고 불쾌한 일에 대한 부정적 감정은 훨씬 덜 줄어든 것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우울증이나 우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같은 사건을 경험하고도 과거를 회상할 때 긍정적인 것은 덜 긍정적으로, 부정적인 것은 더욱 부정적으로 느낄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우울 성향이 없는 사람들의 기억은 긍정적으로 왜곡돼 있고 오히려 우울 성향이 있는 사람들의 기억이 당시 정서 강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요약하자면, 우울 성향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다수의 사람은 부정적인 일보다 긍정적인 일을 더 잘 기억하고, 긍정적인 일보다 부정적인 일에 대해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의 강도를 훨씬 더 작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점은 많은 사람이 뭔가 긍정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아픈 기억, 나쁜 기억을 즐거운 기억, 좋은 기억보다 조금 더 잘 잊는 경향 덕분에 당장 힘든 기억에 관해 시간은 약이 될 수 있다.

부정적인 면도 분명 있다. 세상을 객관적으로 못 보거나, 과거의 아픈 기억을 교훈 삼아 제대로 준비하거나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만나면 티격태격 싸우는 커플의 경우, 헤어지고 몇 달이 지나면 과거 불쾌한 정서의 강도는 크게 줄어들어 좋은 기억이 더 많았다고 착각하며 다시 만나고, 그러다 다시 싸우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할 수 있다. 혹은 객관적으로 안 좋은 일이나 실패한 일이 많았음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비슷한 행동을 반복하는 일도 있다. 실패의 경험을 교훈 삼아 발전하기 위해서는 나쁜 기억일수록 잘 기록해두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기억과 정서와의 관계와 관련된 두 번째 발견은, 기억이 처음 생성될 때(부호화 단계)의 정서 상태와 그것을 기억해 낼 때(인출 단계)의 정서 상태가 서로 일치하면 기억이 잘된다는 것이다(기억의 부호화 단계와 인출 단계 등 기억 과정과 관련된 설명은 두 달 전 필자의 ‘기억이란 무엇인가’ 칼럼을 참고하길 바란다).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어떤 일을 경험했다면, 나중에 본인의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그 일을 더 잘 기억해 낼 수 있고, 반대로 어떤 일을 불안한 상태에서 경험했다면 나중에 본인이 불안한 상태에서 그 일을 더 잘 기억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시험공부를 편안한 기분으로 했다면 그 기억을 떠올려 시험을 치를 때도 편안한 기분으로 해야 도움이 된다. 하지만 시험공부는 편안한 기분으로 했다가 막상 시험은 불안한 기분으로 본다면 기억 인출에 부담을 갖게 된다. 따라서 공부할 때(부호화 단계)와 시험 볼 때(인출 단계)의 정서를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공부할 때도 시험 볼 때를 상상하며 긴장감을 느끼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비단 정서 상태뿐 아니라, 부호화 단계에서 장소나 상태와 같은 맥락이 인출 단계에서도 일치하면 기억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떤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 평소에는 잘 기억이 안 나다가도 막상 그 장소에 가면 생각날 수 있다. 혹은 술을 한잔 마신 상태에서 어떤 일을 경험했다면 보통 때는 그 일이 잘 기억이 안 나다가 술을 한잔 마시고 그 일을 더 잘 기억할 수도 있다.

요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불안하거나 우울하다는 얘기를 한다. 부호화 단계와 인출 단계의 정서 일치 효과에 근거해서 생각해 보자면, 현재 기분이 안 좋으면 과거 기분이 안 좋았을 때의 일들이 좀 더 쉽게 떠오를 수 있다. 과거 기분이 안 좋았을 때의 일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일일 가능성이 크고 그런 일들이 생각나면 기분은 더 안 좋아질 수 있다. 즉 불안하거나 우울한 기분에 점점 더 빠져들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가벼운 산책이나 운동 등을 통해 기분을 전환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기억과 정서 간의 관계와 관련된 주요 발견이 기억의 부호화 단계와 인출 단계의 일치성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은 부호화 단계에서, 즉 어떤 일을 경험할 때 경험하는 사람의 정서 상태와 경험한 일의 정서가(情緖價·valence·정서의 긍정 및 부정 정도)의 일치와 관련된 것이다. 세 번째 질문을 쉽게 풀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기분이 좋을 때 긍정적 일들을 더 잘 기억하고, 반대로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부정적 일들을 더 잘 기억할까? 이 질문에 대한 연구 결과는 ‘그렇다’다. 즉, 기억하는 사람의 정서적 상태와 기억할 정보의 정서가가 일치할 때 기억이 더 잘된다는 것이다. 이를 기억의 정서 일치 효과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 일치 효과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주요 발견보다도 좀 더 일관되고 강력한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가령 어떤 학생이 좋아하는 과목이 국어고 싫어하는 과목이 수학이라면, 학생은 각 과목을 어떤 기분일 때 공부하는 것이 좋을까? 기분이 안 좋을 때 좋아하는 국어 공부를 하고, 기분이 좋을 때 싫어하는 수학 공부를 그래도 참으면서 한다? 물론 기분이 안 좋을 때 좋아하는 국어를 공부하면 기분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기억에는 도움이 안 된다. 정서 일치 효과에 따르면 국어는 기분이 좋을 때, 그리고 수학은 기분이 나쁠 때 공부하는 것이 기억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어떤 사람에게 지난 한 달 동안 긍정적인 일이 10번, 부정적인 일이 10번 있었다고 하자. 앞서 언급한 대로 이런 경우 보통 사람 같으면 나중에 과거 일을 회상할 때 긍정적인 편향이 일어나서 긍정적인 일이 조금 더 있었다고 기억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만일 그 사람이 지난 한 달 동안 계속 기분이 안 좋고 우울한 상태였다면 어떻게 될까? 강력한 정서 일치 효과에 의해 이 사람은 지난 한 달 동안 자신에게 부정적인 일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났다고 기억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이런 부정적 기억들로 인해 기분은 더 우울해지고 그 우울한 기분은 다시 좋거나 나쁜 일이 비슷하게 일어나도 나쁜 일을 더 잘 기억하게 만들고 이런 기억은 다시 이 사람을 더 우울하게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로 빠지게 한다. 우울증이라는 정서장애는 이렇게 기억이라는 인지작용과 상호작용하며 작동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깨도록 돕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감각, 기억, 의식, 정서, 판단 등이 각기 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수시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매우 다양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비록 많은 심리학자, 뇌인지과학자가 그 복잡한 상호작용 방식들과 기전들을 연구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그 대부분을 모르고 있다.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 용어설명

정서의 두 차원 : 정서는 크게 두 가지 독립적인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의 차원은 각성(arousal) 수준이고 또 다른 차원은 정서가(情緖價·valence)다. 정서가는 아주 긍정적인 값부터 아주 부정적인 값까지 연속적인 차원으로 표시할 수 있고, 각성 수준 역시 아주 높은 각성 수준부터 아주 낮은 각성 수준까지 연속적인 차원으로 표시할 수 있다. 가령 2002년 월드컵 8강전에서 한국이 승부차기에서 이겼을 때 우리는 매우 각성된 상태면서 동시에 매우 긍정적인 정서가를 경험했다. 각성 수준이 낮으면서 긍정적인 정서가는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침대에서 편안하게 잠을 청할 때 느끼는 정서일 수 있다. 매우 부정적인 정서가면서 높은 각성 상태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극도로 불안하거나 공포, 슬픔, 분노를 느낄 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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