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8월 19일 쿠데타 세력이 동원한 탱크 위에서 소련 민주화의 의지를 담은 성명서를 낭독하는 보리스 옐친. 사진 아래 옐친 지지자들 속에서 뒤를 바라보는 안경 쓴 사람이 ‘1991’의 저자 마이클 돕스 당시 워싱턴포스트 기자이다. 모던아카이브 제공
1991년 8월 19일 쿠데타 세력이 동원한 탱크 위에서 소련 민주화의 의지를 담은 성명서를 낭독하는 보리스 옐친. 사진 아래 옐친 지지자들 속에서 뒤를 바라보는 안경 쓴 사람이 ‘1991’의 저자 마이클 돕스 당시 워싱턴포스트 기자이다. 모던아카이브 제공

- 1991: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 마이클 돕스 지음,허승철 옮김 / 모던아카이브

워싱턴포스트 소련주재 기자
1979년 아프간 침공 때부터
1991년 해체까지 과정 서술
감시·탄압·조작 독재통치로
스스로 붕괴한 빅브러더 규정


워싱턴포스트의 소련 주재 기자였던 이 책의 저자 마이클 돕스가 1980년 8월 15일 레흐 바웬사의 주도로 파업 중인 폴란드 그단스크의 레닌조선소를 취재 차 방문했을 때 파업현장은 놀라울 정도로 경쾌한 분위기였다. 노동자들이 공산주의 압제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기념비에 사용할 재료에 대해 토론할 때 누군가가 연단에 실물 크기의 레닌 동상을 가리키며 제안했다. “더 이상 레닌 동상이 필요할 일은 없을 겁니다. 저걸 씁시다.”

1991년 8월 19일 소련의 보수강경파는 쿠데타를 일으켜 탱크로 당시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의 집무실을 에워쌌다. 옐친은 집무실 앞의 계단을 결의에 찬 모습으로 성큼성큼 내려왔다. 100여 명의 지지자 사이에서 “옐친, 옐친”과 “공산당을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옐친은 탱크에 올라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탱크 부대원들은 당황해서 어안이 벙벙한 듯 보였다. 옐친은 군중을 향해 “이 동무들이 아직 러시아 대통령을 쏠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요”라고 재치있게 농담을 던졌다. 그 군중 사이에 있던 돕스 기자도 이 역사적인 농담을 들었다.

현대사에서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는 가장 큰 뉴스 중 하나일 것이다. 1991년 12월 25일 오후 7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방송연설에서 “본인은 독립국가연합(CIS) 창설에 관한 정국상황에 따라 소비에트공화국 연방 대통령으로서의 활동을 마칩니다”라며 소련의 해체를 공식 선언했다. 옐친의 쿠데타 저지와 CIS 창설 이후 수개월만이다. 폴란드 자유노조가 레닌 동상을 기념비 제작을 위해 끌어내린 뒤 정확히 11년 만이었다. 역사상 가장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실험은 실패했다. 소련 몰락의 결정적인 사건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서였을까.

소련·동구권 전문기자로 명성을 날린 저자는 소련의 베트남전쟁으로 불리는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년)의 어이없는 결정을 시작으로 폴란드 자유노조의 활동,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 베를린 장벽 붕괴, 옐친의 쿠데타 저지 연설과 고르바초프의 해체 선언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지켜본 12년간 소련 붕괴의 결정적인 사건과 순간들을 서술하고 있다. ‘1991’은 앞서 ‘1945’와 ‘1962’에 이은 ‘냉전 3부작’의 완간 작이다. 책의 원제목은 ‘빅브러더를 타도하라’(Down with Big Brother)로, 조지 오웰의 ‘1984’ 중에서 따왔다. 저자는 KGB 등 정보기관과 군대, 칠흑 같은 언론통제에 의존해 감시와 탄압, 조작으로 일관하며 스스로 거대한 화석이 된 구소련·동구권의 지도자들을 ‘빅브러더’로 칭한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은 사실상 ‘자멸’이었다는 것이다.

그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대한항공 007편 격추’가 소련 몰락의 결정적 사건 중 하나로 다뤄진다는 점이다. 소련은 첫 5일간은 격추 사실을 숨기다가 권력의 핵심인 정치국 회의를 거치며 보잉 747기가 경고등을 켜지 않고 비행했다는 등 거짓 주장을 펼쳤고, 종국에는 “제국주의 세력의 공격”이라는 상투적인 공세로 전환했다. 이 전략은 당시 정치국원이던 고르바초프의 입에서 나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이 사건은 수십 년간 자발적 고립이라는 곁길로 새게 한 체제, 반대 의견을 억누르고 새로운 도전을 유연하게 다룰 능력이 없는 체제, 상식보다 이념을 중시하는 체제의 총체적인 우둔함을 보여주었다”고 비판한다. 스탈린 시대 이후 잘 짜인 의식처럼 진행되는 정치국 회의와 ‘민주적 중앙집권제’란 허울 아래 1800만 공산당원 모두의 의견을 일치시키고 어떤 반론도 용납하지 않는, 거대 공룡화석이 된 소련은 민항기 격추라는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질러 몰락의 징후를 뚜렷이 보였다는 것이다.

“크렘린 정치는 병원 침대 주변에서 머물렀다”는 저자의 지적은 핵심이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매일 신문의 1면을 장식하며 신격화됐지만, 자신의 몸도 추스르지 못해 휴양지 별장이나 병원에서 경호원과 체스 게임을 하는 게 일상이었고, 그의 건강상태는 권력 핵심들만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정보이자 크렘린이 철저히 감추는 비밀이었다. 브레즈네프 이후 유리 안드로포프는 집권 10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007편 격추’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그는 온갖 의료장비와 크렘린 직통전화가 설치된 병실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뒤를 이은 콘스탄틴 체르넨코 역시 74세의 중병에 걸린 노인이었다. 공산당의 핵심은 늙고 병든 지도자를 세워 광대로 만들고 자기들끼리의 권력투쟁에 골몰했던 것이다. 저자는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에 어떤 사건이나 인물도 결정적이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는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에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공산주의는 자멸했다.” 672쪽, 3만5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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