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총재는
김영수 프로당구협회(PBA) 총재의 스포츠 이력은 화려하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농구연맹(KBL) 총재, 2009년부터 2011년까지 2018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고문, 2011년부터 2015년까지 2014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위원장, 2012년부터 지금까지 대한체육회 고문을 맡고 있으며 지난해 출범한 PBA를 총지휘하고 있다.
김 총재가 체육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디딘 지 16년이 지났다. 1995년 문화체육부 장관으로 인연을 맺은 것까지 포함하면 25년이나 된다.
원만하고, 합리적이며, 두뇌 회전이 빠르기 때문일까. ‘소방수’로 긴급 투입된 김 총재의 경력이 눈길을 끈다. 그는 중도 사퇴한 김영기 KBL 총재, 연임이 불발된 이연택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의 후임으로 기용됐다. 김 총재는 “KBL과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에서 내 역할은 화재 진화였다”면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취임했지만, 원칙을 지키고 소통을 강화하면서 자리를 잡았다”고 설명했다.
인천아시안게임 당시엔 미처 예상치 못했던 큰 어려움을 겪었다. 문체부가 약속한 예산 지원을 제때 받지 못했던 것. 하지만 인천아시안게임은 약 233억 원의 흑자를 거뒀고,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로부터 역대 최고의 대회였다는 극찬을 받았다. 김 총재는 “중도 부임으로 인해 억울함도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조직을 정비해 성과를 거뒀다”면서 “지금 PBA를 운영하는 데 과거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KBL 총재로서 그는 중국, 일본과의 교류·협력을 강화했다. 김 총재는 한국과 중국 프로농구 올스타전, 한국과 일본 챔피언전 등을 구상하고 성사시켰다. 아울러 유소년 농구교실 육성 등을 통한 저변 확대에 힘썼다. 김 총재는 “KBL에서 4년가량 지내면서 프로농구 발전을 위해 국제화와 유망주 육성을 적극 추진했다”면서 “프로당구 역시 세계화, 유망주 육성에 주력하면서 질과 양의 성장을 유도하겠다”고 약속했다.김 총재는 다양한 분야에 몸담았다. 검사, 국회의원, 청와대 비서관, 장관 등을 역임한 뒤 체육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선수 출신은 아니지만, 스포츠 이력이 화려하기에 체육인의 범주에 속한다. 김 총재는 “내 정체성이 조금 애매하다”며 “국회에도 1년가량 있었지만 ‘정치인’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 총재는 “정부 체육 행정을 맡으면서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계속 인연이 맺어졌다”면서 “법조 출신의 체육 행정가로 불리는 게 어울리는 듯하다”고 덧붙였다.
허종호 기자 sportsher@munhwa.com
김영수 프로당구협회(PBA) 총재의 스포츠 이력은 화려하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농구연맹(KBL) 총재, 2009년부터 2011년까지 2018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고문, 2011년부터 2015년까지 2014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위원장, 2012년부터 지금까지 대한체육회 고문을 맡고 있으며 지난해 출범한 PBA를 총지휘하고 있다.
김 총재가 체육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디딘 지 16년이 지났다. 1995년 문화체육부 장관으로 인연을 맺은 것까지 포함하면 25년이나 된다.
원만하고, 합리적이며, 두뇌 회전이 빠르기 때문일까. ‘소방수’로 긴급 투입된 김 총재의 경력이 눈길을 끈다. 그는 중도 사퇴한 김영기 KBL 총재, 연임이 불발된 이연택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의 후임으로 기용됐다. 김 총재는 “KBL과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에서 내 역할은 화재 진화였다”면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취임했지만, 원칙을 지키고 소통을 강화하면서 자리를 잡았다”고 설명했다.
인천아시안게임 당시엔 미처 예상치 못했던 큰 어려움을 겪었다. 문체부가 약속한 예산 지원을 제때 받지 못했던 것. 하지만 인천아시안게임은 약 233억 원의 흑자를 거뒀고,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로부터 역대 최고의 대회였다는 극찬을 받았다. 김 총재는 “중도 부임으로 인해 억울함도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조직을 정비해 성과를 거뒀다”면서 “지금 PBA를 운영하는 데 과거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KBL 총재로서 그는 중국, 일본과의 교류·협력을 강화했다. 김 총재는 한국과 중국 프로농구 올스타전, 한국과 일본 챔피언전 등을 구상하고 성사시켰다. 아울러 유소년 농구교실 육성 등을 통한 저변 확대에 힘썼다. 김 총재는 “KBL에서 4년가량 지내면서 프로농구 발전을 위해 국제화와 유망주 육성을 적극 추진했다”면서 “프로당구 역시 세계화, 유망주 육성에 주력하면서 질과 양의 성장을 유도하겠다”고 약속했다.김 총재는 다양한 분야에 몸담았다. 검사, 국회의원, 청와대 비서관, 장관 등을 역임한 뒤 체육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선수 출신은 아니지만, 스포츠 이력이 화려하기에 체육인의 범주에 속한다. 김 총재는 “내 정체성이 조금 애매하다”며 “국회에도 1년가량 있었지만 ‘정치인’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 총재는 “정부 체육 행정을 맡으면서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계속 인연이 맺어졌다”면서 “법조 출신의 체육 행정가로 불리는 게 어울리는 듯하다”고 덧붙였다.
허종호 기자 sportsher@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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