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머리 ‘유럽의 죽음’

유럽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국경 없는 하나의 유럽을 지향하는 유럽연합(EU)의 정신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위기 상황에선 흔히 ‘적대세력’을 세웁니다. 바로 유럽의 난민입니다. 17일 영국·프랑스·독일·터키 정상이 화상회의를 열고 ‘유럽으로 향하고 있는 난민 행렬과 코로나19 확산에 대응하기 위한 협력방안’을 논의했습니다. 대중의 불안을 업고 번지던 ‘난민 = 코로나19’의 표상이 정상회의 의제로까지 옮겨간 걸까요. 이미 유럽에서는 코로나19 확산의 원인자로 이슬람 난민을 지목하는 혐오 분위기가 번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앞장선 인물이 유럽 내 반(反)난민, 극우 민족주의 선봉장인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일 겁니다. 그는 최근 코로나19 발병과 확산 책임을 난민을 비롯한 이란 등 외국인들에게 돌리는 발언을 남발해 논란이 됐습니다. 난민에 대한 반감과 공포를 자극하는 전략으로 3연임에 성공한 오르반은 부패 스캔들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다시 확고한 적대세력을 만들어 벗어나고 있습니다.

오르반 총리가 2018년 3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추천한 책이 이번 주에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유럽의 죽음’(더글러스 머리 지음, 유강은 옮김/열린책들)입니다. 2017년에 출간돼 미국과 유럽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논쟁을 불렀던 책의 원제목은 ‘유럽의 이상한 죽음: 이민, 정체성, 이슬람’(The Strange Death of Europe: Immigration, Identity, Islam)입니다. 책에도 등장하는 오르반의 추천과 책의 제목에서 짐작되듯, 저자는 유럽 대륙이 이슬람에 점령당할 것이고 유럽의 정체성은 죽음을 맞이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합니다.

영국의 젊은 언론인이자 정치 논평가로 소개된 저자 더글러스 머리는 위키피디아 등에서는 보수주의자, 신보수주의자, 이슬람 비판자 등으로 규정됩니다. 뉴욕타임스(NYT)가 2018년, 소수자들(여성, 유색인, 성 소수자, 이민자, 무슬림)을 혐오와 차별로부터 보호하는 진보적 흐름에 의해 오히려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며 반발하는 지식인 그룹을 ‘지성의 암흑망’(Intellectual Dark Web)이라고 명명했는데, 그 그룹의 일원으로도 추정되는 인물입니다.

“지금 유럽은 자살 중이다”라는 자극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은 유럽 난민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그 규모와 난민 개개인의 인간적 비극을 전달하고, 난민 사태에 허둥대는 유럽 각국 정부의 무기력함을 질타합니다.

저자는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너그러운 탓에 이 과정에서 비자유주의나 반자유주의가 번성하게 된 것은 아닐까?”라며 다문화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피력합니다. 극우에 의한 파시즘 재현의 우려가 나오는 것에 대해 저자는 거꾸로 현재의 관용적 대처를 파시즘으로 진단합니다. “파시즘이 역사 속으로 멀리 물러나고 눈에 보이는 파시스트들이 줄어들수록 더 많은 자칭 반파시스트들이 정치적 덕목이나 목적 비슷한 것을 유지하기 위해 파시즘을 필요로 했다”고 말입니다. ‘난민 바이러스’에 기댄, 더 위험한 파시즘의 등장을 경계하게 하는 반면교사의 책입니다. 512쪽, 2만5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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