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석 국제부 차장

역사에 가정은 없다. 선택과 결과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대만인들은 1월 총통선거를 떠올리면 가슴을 쓸어내릴 만하다. 민주진보당(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당시 57.13% 득표로 38.61%에 그친 국민당 한궈위(韓國瑜) 가오슝(高雄) 시장에게 압승했다. 1년 전 상황은 정반대였다. 경제난에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차이 총통은 레임덕 상태였던 반면, 한 시장은 한류(韓流·한궈위) 돌풍 한복판에 있었다. 선거는 해보나 마나였다. 선거구도를 뒤바꾼 것은 중국이었다. 지난해 6월 범죄인인도법안 개정 반대로 시작된 홍콩 반정부시위에 지지율이 역전됐다. ‘만약’ 홍콩시위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대만은 현재 중국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가장 잘 대처한 국가다. 인구 2600만 명에 22일 현재 확진자는 169명뿐이다. 중국 경제의존도가 가장 높고 연 1000만 명 이상이 중국을 오가지만 첫 확진자가 발생하자 1월 말 곧장 마스크 수출통제에 나섰고 2월 초 중국인 입국을 전면 차단한 덕이다. 독립파 차이 총통이 아닌 친중파 한 시장이 총통으로 선출됐다면 과감한 입국금지 대신 한국처럼 중국과의 관계를 놓고 좌고우면하다 초기 대응에 실패했을 가능성이 크다.

민주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이론과 달리 현실적으로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기회는 4년에 한 번, 5년에 한 번 돌아오는 선거뿐이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민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잘못 생각했다.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선거기간뿐이다. 일단 의원들이 선출되면 즉시 노예가 된다”고 말했다. 선거제의 한계를 꼬집는 말이다. 4월 총선이 다가오면서 어김없이 정치 혐오에 기반한 ‘선거무용론’이 고개를 쳐든다. 정당이나 후보의 정책·비전 제시는 온데간데없고 권모·술수·배신이 판치는 막장드라마를 볼라치면 기권할 자유를 행사하고픈 마음이 절로 치민다. 눈 씻고 봐도 뽑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코로나19 사태 속에 굳이 투표장을 찾아 1m 간격으로 줄을 서는 ‘모험’을 감행해야 하나 싶다.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선거는 중요하다. 국민의 정치 의사를 집약하고 주권 행사를 통해 정치권력을 교체할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국민을 우습게 아는 정치인들이 머리 숙이고, 허리 굽히고, 귀 기울이는 것도 이때뿐이다. 코로나19 발병 초기 무관심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돌변해 국가비상사태 선포, 경기부양책 추진 등을 서두른 것도 바로 11월 대선 때문이다. 3월 초 총선을 치른 이스라엘도 1월 말 중국발 항공기 착륙 불허, 2월 22일 한국인 입국금지 등 유례없이 발 빠른 대응을 보여줬다. 정치학자 프랭클린 애덤스는 “선거란 누구를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 뽑지 않기 위해 투표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대만 사례에서 보듯 코로나19와 싸우는 지금이야말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투표장에 가야 할 순간이다. 투표만이 “한·중은 공동운명체”라며 전문가들의 중국발 입국금지 요청에 눈 감고 귀 닫은 채 신천지·대구에 집중한 정권의 방역정책에 대한 국민 의견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 닥친 경제위기 등 갈 길이 먼 코로나19와의 싸움에 끝내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꼭 투표장에 나가야 한다.
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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