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직 논설위원

국가 시스템 중 가장 신뢰가 중요한 게 화폐다. 화폐의 신뢰가 무너진 사회는 어떻게 되는지 역사는 명징하게 보여준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태평양의 뉴기니까지 침공했던 일본이 폭격에 사용한 건 포탄뿐만이 아니었다. 난데없이 조개껍데기까지 마구 뿌려댔던 것. 원주민들이 조개껍데기를 화폐로 쓰는 걸 간파해 뉴기니의 화폐 가치를 폭락시켜 경제를 교란하는 전술을 구사했던 것이다. 같은 시기 독일이 영국을 상대로 펼쳤던 ‘베른하르트 작전’도 있다. 나치 친위대가 140여 명의 유대인 최고 기술자들을 강제수용소에 모아 1억3000만 파운드의 위조지폐를 제조했던 것. 몇 t에 달하는 위조지폐를 영국 상공에 투하하는 방안까지 검토했었다고 한다. 화폐 질서를 교란해 영국을 흔들려던 나치의 집요함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재정이 빈약해진 코모두스 황제가 로마 은화 순도를 5%까지 떨어뜨린 악화(惡貨)를 남발하고, 네로 황제는 도금 화폐까지 만들어 뿌리면서 로마는 그렇게 망했다. “한 사회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수단 가운데 화폐의 타락만큼 교묘하고 확실한 방법은 없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가 인플레이션 위험을 경고하며 했던 말이다.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돈을 타락시키는 것”이라는 레닌의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돈이 돈 구실을 못해 나타나는 화폐타락 징후가 2020년 전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위기극복을 명분으로 세계 각국 정부가 경쟁적으로 ‘돈 풀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더 많은 돈 살포를 요구하는 정치인 목소리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돈값(금리)이 바닥(0%대)인 상태에서 시중에 돈이 쏟아져나오면 화폐 타락, 즉 화폐 가치의 추락은 피할 수 없다. 코로나 팬데믹이 몰고 온 미증유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재정·통화 확대가 불가피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과도하게 풀린 돈은 당장은 달콤하고 만병통치약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점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자금 수혈을 필요로 하는 곳에 핀셋지원 해야지,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려대듯이 하면 더 큰 화(禍)를 초래한다. 더욱이 기축통화나 안전자산국도 아닌 한국이 여권의 4월 총선 유혹까지 더해져 이 와중에 어설프게 휩쓸리다간, 한 방에 훅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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