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영 서울대 명예교수 국제정치학

미국과 북한이 관계개선을 위한 탐색전에 나서고 있다. 북한의 잇단 방사포와 단거리 미사일 발사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내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대북 지원 의사를 밝혔다. 그는 지난 22일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북한은 이란이 겪은 것처럼 매우 심각한 시점으로 가고 있으며, 우리는 북한과 이란 등을 기꺼이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이 제의는 11월 대선과 코로나19 방역으로 여념이 없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북 관계개선을 원하는 신호이며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한 긍정적 조치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는 지난 22일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담화를 통해 공개됐다. 김여정이 대남 강경파 리선권 외무상과 오랜 외교 경력의 최선희 제1부상을 제치고 전면에 나선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난해 2월 하노이 회담 결렬로 곤혹스러운 경험을 한 김정은 대신, 여동생이 전면에 나선 것은 지도자의 탄탄한 신임과 막강한 권한 부여를 의미한다.

유감스럽게도 트럼프 친서에 북한 비핵화 언급이 없다. 김여정이 “북·미 관계를 정상들의 개인적 친분에 따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트럼프·김정은 간의 친분 강조에 선을 그은 점이 흥미롭다. 그는 “두 나라 사이에 역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평형이 유지되고 공정성이 보장돼야 대화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 재개 가능성을 시사한다. 아울러 ‘공정성과 균형이 보장’돼야 하며, 김정은이 결코 쉬운 협상 상대가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다만, 김정은이 트럼프의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협조 의향에 쉽게 호응할지는 미지수다. 김여정이 요구한 선제조건에 북핵 인정과 군축회의, 한·미 군사훈련 중지와 주한미군 철수, 제재 완화나 해제, 주권 존중과 내정 불간섭(인권 등), 평화협정 등 어렵고 복잡한 요구들이 포함된다. 트럼프의 우선순위는 11월 대선과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승리다. 물론 미국이 코로나19 방역을 지원해도, 미·북 관계가 금방 우호적으로 바뀌진 않는다.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가 트럼프의 의료 지원을 거절했듯이, 중국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김정은도 끈 달린 미국 원조를 거절할 수 있다. 한·미 모두 국내정치와 코로나19 퇴치에 올인할 때 김정은은 핵·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한국이 처한 현 상황, 리더십 및 대내외 정책에 문제가 많다. 사회 분열상은 심각하다. 정치·경제적 난국을 타개할 경륜 있는 현명한 정치인이나 정책결정자는 보이지 않는다. 전략적 비전 결여와 이념적 편향성 및 코드 인사는 사활적 이익이 걸린 외교·안보 정책을 그르치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탄도미사일 보유국이 됐다.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까지 생각하며 한·중 밀착을 우려한다. 부국강병의 중국은 한국에 대해 고압적 태도를 보이기 일쑤다. 한·일 관계는 비정상적으로 악화해 회복이 쉽지 않다. 군의 기강은 해이해졌고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북한은 남북관계를 중시하는 문재인 정부에 대해 모욕과 비판을 서슴지 않으며, 미국과 직접 협상하려 든다. 한국의 미래는 불확실하며, 국민의 성취 의욕은 크게 위축됐다. 이제 새 판을 짜야 한다. 미·북이 한국을 제외하거나 경시한 채 거래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 한국은 미·북 간의 협상과 거래에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미국 대통령의 친서와 김여정의 담화를 보기만 할 게 아니라, 한국의 입장과 이익을 분명히 밝히고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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