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력주의 / 마이클 영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매진
유능한 부모 유능한 자녀 낳고
일자리 상속 관행까지 확산
공평하다 믿었던 ‘능력주의’
불평등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영국 노동당 지지하던 저자
현대세계 작동원리·구조화 등
사회비판 소설 통해 예언
“그동안 능력주의는 이상적인 시스템으로 여겨졌으며 사람들은 능력주의를 숭배하기까지 했다. 그 누구에게도 차별적 특혜를 주지 않으며,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며, 타고난 계층 배경이나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상관없이 오로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보상을 제공한다는 논리는 수많은 사람을 현혹시켰다.”
그들이 언급한 ‘능력주의’란 바로 이 책의 제목에서 따온 단어다. 의미도 같다. ‘능력주의’란 지능과 노력을 능력(merit)으로 보고 기회만 균등하다면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저자 마이클 영(1915∼2002)은 영국 출신 사회학자, 사회운동가로 1958년 이 책을 썼다. 원제는 ‘능력주의 사회의 부상(The Rise of Meritocracy)’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인 책 집필 당시 ‘능력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디스토피아(dystopia, 사회비판)’ 소설이다. 이야기는 1958년을 기점으로 2034년의 미래까지 이어진다. 1958년 이전을 다룬 부분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만, 그 뒤는 지은이가 현실의 흐름을 바탕으로 예상하고 상상한 허구다. 소설 속 주인공 마이클 영은 1958년 이전부터 ‘교육평등’ 개념과 함께 등장하기 시작한 능력주의가 진화해 가는 과정을 그리며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 선다. 그러나 영국 노동당을 지지하던 현실 속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지닌 인물이다.
저자가 볼 때 소설 속 능력주의 사회나 우리가 지금 겪는 능력주의는 모두 획일화된 시험을 중요한 도구로 활용한다. 대입 시험, 입사 시험, 자격시험, 국가고시 등이 모두 ‘평등’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시험 형태를 취한다. 소설 속 능력주의 사회는 지능 측정이 점점 과학화되고 정밀해지면서 잠재적 아이큐, 곧 미래에 높아질 수 있는 아이큐 최대치를 정확히 예측하는 기술도 발달한다.
소설에서는 한동안 순조롭게 작동하던 능력주의 체제는 계급 간 격차가 눈에 띄게 벌어지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굳어지면서 계층 사이의 사회적 이동이 가로막히며 저항 세력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지능 검사 기법이 발달하고 유능한 아버지가 유능한 자녀를 낳는 지능우생학과 일자리 상속 관행이 확산된 결과, 어느 정도 무작위로 분포하던 지능은 폭넓은 재분배 과정을 거쳐 계급 간 격차를 그대로 드러낸다.
다음과 같은 소설 속 대목은 저자의 비판적 견해를 잘 반영하고 있다.
“1914년에 상층 계급에는 공정한 몫의 천재와 둔재가 있었고, 노동 계급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다르게 말하자면, 똑똑하고 운 좋은 몇몇 노동 계급 남성들은 사회에서 종속된 상황인데도 언제나 상층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열등 계급에도 거의 상층 계급 자체만큼이나 높은 비율의 우월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능은 어느 정도 무작위로 분포됐다. 각각의 사회 계급은 능력으로 볼 때 사회 자체의 축소판이었다. 부분은 전체하고 똑같았다.”
한때 ‘평등의 황금기’를 이끈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운 좋은 정자 클럽’에 든 기득권층과 세습 엘리트들만 올라가는 출세의 사다리는 더욱 견고해진다.
이제 엘리트들의 능력은 기득권 계급의 자격증이 되고, 능력 있는 엘리트들의 계급은 자식 세대로 이어진다. 능력은 계급이 되고, 계급은 세습된다. 저자는 소설 속에서 미래사회인 2009년 기술자당에 속한 한 지역 그룹의 ‘첼시 선언’을 통해 ‘기회균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기회균등이란 사회의 계층 사다리를 올라갈 기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각자 타고난 덕과 재능, 인간 경험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모든 능력, 삶의 잠재력을 ‘지능’에 상관없이 최대한 발전시킬 기회를 균등하게 만드는 일이다. 모든 어린이는 단순히 사회에 필요한 잠재적인 직무 담당자가 아니라 소중한 개인이다. 학교는 직업 구조에 밀접하게 결부돼 어떤 특정한 순간에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일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을 배출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재능을 장려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 저자가 볼 때 모든 어린이는 지능 검사의 대상이 돼야 하는 ‘인적자원’이기에 앞서 ‘소중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영은 현대 세계의 주요한 조직화 원리를 이미 1958년에 예언한 셈이다. 실제로 능력주의는 미국을 중심으로 근대화의 척도이자 현대인의 신앙이 된다.
강남권 학원가에서 벌어지는 ‘입시 전쟁’과 엘리트 계급을 둘러싼 ‘세습 경쟁’에 휩싸여 있는 한국사회 역시 ‘능력주의’의 폐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319쪽, 1만6000원.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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