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미국 노스찰스턴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 유세. 지지자들이 “미국을 계속 위대하게” 등의 푯말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트럼프 지지층은 대립과 혐오를 동력으로 하는 ‘부족주의 정치’를 촉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AP 연합뉴스
지난 2월 미국 노스찰스턴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 유세. 지지자들이 “미국을 계속 위대하게” 등의 푯말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트럼프 지지층은 대립과 혐오를 동력으로 하는 ‘부족주의 정치’를 촉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AP 연합뉴스

정치적 부족주의 / 에이미 추아 지음, 김승진 옮김/부키

거대 이데올로기의 대립 아닌
인종·지역·종교 집단 본능이
전세계 정치적 격동의 주원인

베트남전서 美가 패배한 것도
화교 영향력에 대한 몰이해탓
이라크·아프간전 등서도 오판

주류위치 위협 느낀 화이트래시
반기득권 정체성 트럼프에 열광
다양한 집단간 제로섬경쟁 시작
韓도 경제·교육 대결 이념 압도


오늘날의 정치는 더 이상 진보 대 보수, 남자 대 여자, 청년 대 기성세대, 부자 대 빈자 등 낡은 이분법적 구도로 읽을 수 없다. 변수가 늘었고 ‘이상 수치’도 많다. 예측과 분석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는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때부터 감지된 현상이기도 하며 15일 치러진 우리나라의 21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재벌인 트럼프를 백악관으로 밀어 올려 준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 계급이었으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으로 우려됐던 우리의 총선 투표율이 2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며 지역구도가 더 선명해진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새로운 정치 지형을 파악하기 위해 새로운 ‘렌즈’가 필요한 시대. 에이미 추아 예일대 로스쿨 교수는 ‘집단 본능’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유대감과 애착을 갈구하며 집단에 소속되길 원한다. 이러한 본능을 토대로 한 정치 행위가 바로 ‘부족주의’다. 국제분쟁 전문가이자 ‘제국의 미래’ ‘타이거 마더’등으로 잘 알려진 추아 교수는 신작 ‘정치적 부족주의’를 통해 세계를 기존의 좌우 프레임이 아닌 ‘부족주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이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트럼프 당선을 초래한 것도 모두 부족주의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1%의 화교가 베트남 부의 70∼80%를 장악하고 있었다. 베트남인들의 적개심도 매우 컸다. 냉전 프레임에 갇혀 있던 미국은 베트남 사람들의 이러한 정체성 ‘부족 본능’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오판은 계속됐다. 두 나라 모두 인종·종교·민족을 기반으로 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고, 미국은 ‘민주주의’가 이를 이길 거라고 맹신했다. 그러나 이라크에 도입된 ‘민주적 선거’는 시아파와 수니파의 대립을 심화시켰고 내전으로 치닫게 했다. 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6500억 달러를 쓰고도 탈레반 축출에 실패했는데, 이 역시 부족 정체성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다. 미국이 ‘헛돈’을 쓰는 동안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이 ‘파슈툰족’의 나라인 것을 강조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다.

미국이 부족주의를 놓친 이유는 뭘까. 저자는 ‘슈퍼 그룹’이라는 미국적 특성을 주요인으로 꼽는다. 이는 저자가 정립한 개념으로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국가’를 근간으로 묶이는 집단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부족적 본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를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와 강력한 집단 정체성을 통해 하나가 된다는 것. 저자는 미국이 ‘슈퍼 그룹’의 관점에서 외교 정책을 펴다가 반복적인 실책을 저질렀다고 설명한다. 이제 미국 사회 내부에서도 ‘부족주의’로 인한 대립과 혐오가 극심해지고, 이를 억제하던 ‘국가’라는 정체성도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경고한다.

미국에서 부족주의 정치를 촉발한 건 백인 남성 노동자 계급의 부상이었다. ‘반 기득권’ 정체성으로 묶인 이 ‘화이트 래시’는 트럼프 당선의 일등 공신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우파적 정치성향을 지닌 이들은 여성, 이민자, 성 소수자 등 그들이 보기에 ‘과도한 특권’을 지닌 소수 집단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다. 이러한 태도는 다시 다른 집단의 ‘부족 본능’을 건드린다. 위기감을 느낀 여성, 이민자, 성 소수자들은 새로운 부족주의로 뭉치고 있다. 트럼프 정권 아래에서 더 많은 사회적 약자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 않나. 결국 현재 미국 내 모든 인종과 계급이 스스로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부족주의가 마치 우파의 문제인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부족주의는 좌우를 막론하고 나타나는 현상이다. 진보 진영의 이슈 중 하나인 성 소수자 표기법 LGBT는 최근 LGBTQQLAAP까지 길어졌다. 알파벳 순서와 추가를 두고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등 여러 ‘부족’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는 것. 빈자를 위한 노동 운동은 고학력 부유층이 주도하며 노동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했고, 420만 명이나 모였던 ‘여성의 날’ 행사 뒤편에선 흑인과 백인 여성이 대립했으며, 흑인 인권 운동을 지지하는 양식 있는 백인들은 시위에서 배제됐다. 이를 두고 저자는 민주주의가 “집단 간의 제로섬 경쟁으로 퇴락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민주주의가 집단 간의 제로섬 경쟁이 됐다는 말에 기시감이 드는 건 미국 내 부족주의, 정체성 정치의 갈등 상황이 지금 한국 사회에도 적용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강남 좌파’ ‘청년 보수’ 등 기존 도식에서 벗어나는 징후들이 나타난 지 오래다. 한국도 경제 및 교육 수준, 종교, 젠더 등이 좌우 대결을 압도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정치구도는 이념이나 이해관계가 아니라 어느 부족에 속했느냐에 따라 갈라진다. 따라서 현대 정치의 기술은 이 제로섬 경쟁을 어떻게 끝내느냐로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미국에서 2018년 발간됐다. 2년이 지난 지금 상황과 약간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백인 우파 부족’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오스카 등 자신들이 중심인 문화 영역이 무너지는 것인데, 저자는 이 같은 위기감에 대해선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그러나 2018년 ‘로마’와 올해 봉준호 감독 ‘기생충’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은 그 공고한 성에 금이 가고 있다는 징후는 아닐까.

추아 교수는 미국이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을 끄집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다. 뉴욕타임스는 그에게 “미국인에게 불편한 존재”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했다. 이번 책에서도 그는 지배층의 오판으로 패배한 전쟁과 부족주의 정치의 만연 등 날카로운 시선으로 미국 사회를 비판한다. 다만, 탁월한 통찰력으로 ‘슈퍼 그룹’을 꿰뚫어 보던 저자가 부족주의의 해결책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거론하며 서둘러 책을 마무리 짓는 건 아쉽다. 미국을 “언젠가 무언가 더 할 일이 있는 나라”라고 칭송하며 ‘미국이 다시 미국이 되게 하자’(랭스턴 휴스, 1935)는 시를 읊는 것이다. 저자가 스스로 밝혔듯 이것은 그의 “선천적인 낙천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352쪽, 2만 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박동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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