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탈린·마오쩌둥 사례 살피며
내부 통제수단 찾는 시간 때문
북한은 ‘최고 존엄’의 건강이상이나 사망 등 급변사태 상황에서 지도부 내부에서는 긴박하게 움직이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정보를 철저히 통제했다. ‘백두혈통’ 중심의 정권 특성상 최고지도자 유고가 주민 동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으로, 북한은 1994년과 2011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사실도 1∼2일 늦게 발표했다. 이 때문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확산하고 있지만, 김정은 위원장의 건강상태는 북한이 발표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외부에서 파악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외교가에서는 지배적이다.
북한 정권을 수립한 김 주석의 1994년 사망이 대표적이다. 김 주석은 1994년 7월 8일 오전 2시에 사망했지만, 북한이 이를 공식 발표한 것은 34시간 이후인 다음날 정오였다. 늦은 발표는 아들인 김정일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후계체제가 공고한 상황이었지만 갑작스러운 김 주석 사망이 불러올 혼란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영국 주재 북한 공사를 지냈던 미래통합당 태구민(태영호) 당선인은 “김 주석 사망을 안 인사는 극히 소수였다”면서 “김영남 외교부장은 ‘마오쩌둥(毛澤東)과 스탈린이 사망했을 때 중국과 러시아가 어떻게 대처했는지 빨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후계자인 김정일 위원장은 외부로부터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북·중 국경부터 일시 봉쇄했다. 이어 내부적으로는 가장 먼저 국가장의위원회부터 구성했다. ‘유훈통치’를 앞세워 승계 정당성을 마련하는 한편, 주요 측근들을 국가장의위원으로 지정해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한 행보였다. 결국 이는 1990년대 중반 수십만 명의 아사자를 낳은 ‘고난의 행군’을 견뎌낼 수 있는 기반이 됐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김 주석 사망 이후 확립된 관례는 2011년 김정일 위원장 사망 당시에도 그대로 재연됐다. 김정일 위원장은 2011년 12월 17일 오전 8시 30분 사망했지만, 이 사실은 51시간 30분 만인 같은 달 19일 정오에 ‘특별방송’으로 공개됐다. 김 주석 사망 때보다 발표 시점을 더 늦춘 것은 후계자인 김정은 위원장의 권력기반이 그만큼 약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고모부였던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등 후견 그룹이 있었지만, 이복형인 김정남이 마카오에 생존해 있었던 점 등을 감안해 좀 더 내부단속에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북한 지도부는 김정일 위원장 사망 발표 하루 전인 같은 달 18일 전군에 특별경계근무 2호를 발령했으며, 북·중 국경을 일부 봉쇄하는 등 군 기강부터 다잡았다. 김정은 위원장도 선대의 전례에 따라 곧바로 장의위원회를 소집했으며, 이듬해인 2012년 4월 노동당 제1비서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추대되면서 권력을 승계했다.
하지만 지금 건강이상설에 휩싸여 있는 김정은 위원장은 선대와는 많이 다르다는 게 북한 전문가들의 평가다. 36세의 젊은 김정은 위원장이 후계 구도를 미리 준비했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김 위원장 유고 시 북한 내부에는 상당한 혼란이 예상된다. 현재 북한 내 ‘백두혈통’은 숙부 김평일, 고모 김경희, 친형 김정철, 여동생 김여정 등이 있지만, 김평일·김경희는 아버지 세대여서 사실상 후계자가 되기 어렵다. 친형 김정철은 이미 권력구도에서 비켜나 있다.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거의 유일하게 정무에 관여하고 있으며, 최근 권력 대행 역할까지 맡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지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공식 서열이 10위권 밖이다. 게다가 군에는 전혀 기반이 없는 데다, 유교 전통이 강한 북한 사회가 여성 지도자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 제1부부장의 권력 기반이 약할 경우 당·군에 새로운 실권 그룹이 생겨나면서 집단지도체제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철순 기자 csjeong1101@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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