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 감독이 대전 자택 내 거실 장식장 앞에서 1998년 US여자오픈 우승 때 받은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바즈인터내셔널 제공
박세리 감독이 대전 자택 내 거실 장식장 앞에서 1998년 US여자오픈 우승 때 받은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바즈인터내셔널 제공

- 500번째 이야기…박세리 바즈인터내셔널 대표

1998년 US오픈 연장 끝 우승
외환위기 빠진 국민에 큰 감동

‘공동묘지 담력 키우기’ 소문
“집에 가는 지름길이 무덤가”
인터뷰서 말한 게 와전 된 것

초반 부진이 징크스지만
연습라운드 이후 본경기서
점차 나아져 역전우승 많아

와인·박세리 브랜드사업 구상
AGLF 이사진 합류 바쁜나날
훗날 기념관 생길것 감안해서
선수때 사용했던 물품 보관중


위로부터 1998년 US여자오픈 우승 후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들고 활짝 웃는 모습. 1998년 8월 17일 자 타임 표지를 장식한 모습과 2007년 11월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연설하는 모습. 2016년 10월 인천 스카이72골프장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아버지 곁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
위로부터 1998년 US여자오픈 우승 후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들고 활짝 웃는 모습. 1998년 8월 17일 자 타임 표지를 장식한 모습과 2007년 11월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연설하는 모습. 2016년 10월 인천 스카이72골프장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아버지 곁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
문화일보가 매주 값진 인생을 가꾼 인물의 골프 이야기를 전한 지 10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지난 2009년 12월 ‘나의 골프 이야기’로 첫 연재를 시작한 이래 이번 주 500번째 이야기의 주인공과 만났습니다. 그는 한국골프의 대명사인 박세리입니다.

“그래도 박 대표(CEO)보다는 박 감독으로 불러주세요.”

한국 골프의 전설 박세리(43) 감독은 요즘 선수 때보다 갑절이나 바쁘다. 박 감독을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의 한 오피스에서 만났다. 이곳은 여자골프 국가대표 감독인 그가 지난해 말 만든 회사 ‘바즈인터내셔널’이 임시로 사용하는 공유 오피스다. 박 감독은 “선수 땐 골프장과 연습장, 숙소를 오갔지만 지금은 이곳저곳 다닐 데가 참 많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제2의 인생’을 위해 지난해 말 회사를 설립했다. 비즈니스를 위해 이곳저곳을 누비느라 요즘도 ‘객지’에서 지내는 날이 많다. 대전 집에는 금요일 저녁에 내려가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부터 서울에 와 주로 호텔에 머문다. 박 감독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대회를 쫓아다닐 때와 비슷하지만, 지금은 짐 싸는 일은 없으니 다행”이라고 말했다. 바즈인터내셔널을 통해 예전의 와인 사업뿐 아니라 ‘박세리 브랜드’를 접목한 의류 등 여러 사업을 구상 중이다. 올해 출범한 ‘아시아 골프 리더스 포럼(AGLF)’ 이사진에 합류한 그는 ‘박세리 희망재단’과 함께 해온 2개의 주니어대회는 물론, 아시아 지역 주니어대회도 추진하고 있다. 주말엔 되도록 약속을 잡지 않고 대전 집에 머문다는 박 감독은 몇 해 전 새 건물을 지어 언니, 동생과 층을 나누어 쓰고 있다. 집 인테리어는 직접 손봤다. 근처 아파트에서 주말이면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방송 출연도 잦다. 박 감독은 4개 안팎의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출연 섭외가 계속 오고 있지만, ‘속도’를 조절하는 중이다. 박 감독은 최근 요리 프로그램에서 요리사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췄다는 칭찬을 들었다. 집에서도 직접 음식을 마련하곤 한다. 박 감독은 “자신 있는 요리는 돼지고기 볶음이지만, 간혹 스파게티도 즐긴다”면서 “은퇴한 뒤 본격적으로 골프 중계 해설을 맡은 지 4년이 지났지만, 올해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마이크를 한 번도 잡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 감독에게 모처럼 추억여행을 주문했다. 박 감독에게 가장 의미 있는 우승은 1998년 US여자오픈. 당시 그의 우승은 외환위기에 빠진 전 국민의 시름을 덜어주었고, 그는 ‘국민 영웅’이 됐다. 최종 라운드까지 태국계 미국인 아마추어 추아시리폰과 동타였다. 다음날 18홀 연장전을 치러야 했다. 연장전이 오전 8시부터 열리기에 전날 일찍 잠을 청했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 4라운드 내용을 복기했다. 이렇게 머릿속에서 18홀을 돌다 보니 어느덧 새벽이 됐다. 박 감독은 “잠깐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잠을 설치고 대회장으로 서둘러 나갔다”면서 “18홀 연장전으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해 2홀을 더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서든데스 승부로 바뀌면서 박 감독의 기록은 지금까지 최장 연장 승부로 남아있다.

박 감독은 “그간의 오해를 풀고 싶은 게 하나 있다”고 운을 뗐다. 그러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박준철)가 담력을 키우기 위해 공동묘지로 그를 보냈다는 일화를 꺼냈다. 박 감독은 “한 번 와전된 얘기가 꼬리를 물고 확대 재생산된 케이스”라고 말하면서 ‘팩트’를 전했다. 박 감독은 “골프를 시작한 뒤 중학생 시절부터 유성CC에서 연습했다. 아침에 아버지가 연습장에 내려주고 일을 보러 가셨다. 공을 치다가 쉬고, 라운드 나가고. 아버지가 데리러 올 때까지 계속 머물렀다. 그런데 연습장 문 닫아야 할 시간, 밤늦도록 아버지가 오지 않은 날도 있었다. 혼자 골프 백을 메고 집으로 가면서 포장도로 대신 11번 홀 등 2개 홀을 가로질러 다녔다. 10분을 단축할 수 있는 유일한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코스엔 불빛 하나 없었고 홀과 홀 사이에 무덤도 여러 개 있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밤에 무덤을 봤다. 무서웠다’고 말했다. 훗날 인터뷰 과정에서 이게 와전됐다”고 설명했다.

박 감독의 선수 시절 징크스는 딱 하나. 대회가 열리는 코스에서 연습 라운드를 하면 이상하리만큼 스코어가 나오지 않았다. 연습 라운드에선 언더파는 고사하고 오버파를 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며 조심스럽게 대회에 임했다. 늘 ‘우승보다는 라운드마다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첫날보다 2, 3라운드가 더 좋고 마지막 날엔 펄펄 날곤 했다. 연습 땐 잘 맞지 않았지만, 경기 땐 좋은 결과가 나왔고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자신감이 붙어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그러다 보니 간신히 컷을 통과하곤 역전승을 거두는 경우가 많아졌고 ‘연장불패’ 신화를 썼다. 그는 LPGA투어 25승 중 6승을 연장전에서 거뒀다.

박 감독은 선수 시절 쳇바퀴 돌듯, 숙소와 대회장을 오갔다. 선수가 감당해야만 하는 숙명으로 받아들였고, 한 번도 벗어나겠단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명예의 전당’ 입성이 목표였던 박 감독은 7년 만에 꿈을 이뤘다. 호사다마일까. 2004년 5월 미켈롭울트라오픈에서 우승,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 위한 마지막 27번째 포인트를 확보한 뒤 슬럼프가 찾아왔다. 미켈롭울트라오픈 정상에 오른 뒤 국내로 돌아와 초청선수로 출전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샷 결과가 좋지 않았고 미국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출전했던 대회에서 컷 탈락했다.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대회에서도 부진했다. 원인을 찾지 못했다. 꿈을 이룬 이듬해, 그러니까 2005년엔 톱 10에 한 번도 들지 못했다. 나비스코챔피언십 공동 27위가 가장 좋은 성적이었고 컷 탈락 3차례와 기권 4차례라는 수모를 겪었다. 그만큼 부상도 잦았다. 골프밖에 몰랐던 그는 이렇게 2년여 동안 ‘멘붕’에 빠졌다. 원인을 찾고 또 찾았지만 허사였다. 올랜도 집 근처에서 친분을 쌓은 교민 부부 덕분에 고민을 해결했다. 교민 부부는 “함께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박 감독에게 제안했고, 차로 2시간 달려 낚시를 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골프클럽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퍼터를 매만지면서 잠들곤 했고, 골프 백은 늘 침대 곁에 두고 잤다. 박 감독은 낚싯대를 잡았지만, 머릿속은 골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 낚시는 달랐다. 물고기가 잘 잡히면서 낚시에 열중했고, 처음으로 골프를 잊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박 감독은 “아! 이거구나”라며 무릎을 쳤다. 골프가 안 될 때는 이렇게 쉬는 게 정답이란 생각이 들었다. 박 감독은 “그로부터 두 달도 안 돼 재기했다”면서 “2006년 6월 맥도날드 LPGA챔피언십에서 캐리 웹(호주)을 꺾고 통산 5번째 메이저대회 우승컵을 안았고, 2년 1개월 만에 부진에서 탈출했다”고 말했다.

긴 슬럼프에서 벗어났지만, ‘골프여왕’의 위력은 줄어들었다. 2007년 7월 코닝클래식 우승이후 3년이 지난 2010년 벨 마이크로 LPGA클래식에서 25번째이자 마지막 우승컵을 품었다. 서서히 그의 마음에서 골프가 떠나고 있었다. ‘쉬지 못하고 앞만 보며 달려왔다’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박 감독은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는 여유가 있었다면 선수생활을 몇 년 연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은 LPGA 입회 10년째이던 2007년 11월 최연소(30세)로 미국 플로리다주 세인트오거스틴의 세계골프 빌리지에서 열린 명예의 전당 입회식.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소감을 밝히던 중 처음 골프채를 잡았던 시절이 떠올라 눈물을 왈칵 쏟았다.

박 감독은 “4년 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처럼 이번에도 도쿄올림픽 코스 사전답사를 마쳤지만, 1년 연기돼 아쉽다”고 말했다. 골프는 감독의 역할이 한정된다. 선수가 경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는 게 골프 감독의 가장 큰 업무.

박 감독은 4년 전에도 열성적으로 국가대표들을 지원했고, 금메달(박인비)의 밑거름이 됐다. 박 감독은 “여자골프의 올림픽 2연패는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감독은 “요즘은 내가 골프를 배웠던 시기의 환경과 너무 다르고, 업그레이드가 됐기에 특별히 후배들에게 건넬 조언은 없다”면서도 “굳이 한마디 한다면 ‘멀리 보고 가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만일 남자로 태어난다면 골프선수가 돼 타이거 우즈(미국)와 겨루고 싶고, 결혼 후 자녀가 골프를 원한다면 안 된다는 대답 대신 재능을 살펴본 뒤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감독의 공식대회 홀인원은 딱 한 번뿐이다. 연습 라운드 등 비공식 홀인원은 3차례 더 있다. 앨버트로스는 LPGA 퀄리파잉스쿨 예선 파 5홀에서 경험했다. 우드로 친 샷이 그대로 들어갔다.

박 감독은 미국에서 활약하면서 사용했던 물품을 컨테이너에 고스란히 싣고 귀국해 대전 집에 보관해두고 있다. 골프를 시작했을 때부터 사용한 골프채도 간직하고 있다. 박 감독은 “풀세트로만 따지면 100세트 분량이 넘을 것”이라면서 “훗날 내 이름을 건 박물관이나 기념관을 따로 만들 생각”이라고 귀띔했다.

박 감독은 비혼주의자가 아니다. 미국 진출 이후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귀었고, 외로운 투어 생활에 큰 힘이 되기도 했다. 다른 연인들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전화로 통화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박 감독은 “얼마 전까지 교제했지만, 그가 ‘골프선수 박세리의 남자’라는 사실을 부담으로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선수 시절부터 정치 입문 요청을 받았다는 박 감독은 이번 4·15 총선에서도 출마 권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박 감독은 “그동안 정치에 관심이 없다며 분명하게 거절했다”면서 “기회가 되고 나를 필요로 한다면, 언젠간 골프 관련 협회에서 ‘골프행정가’로 일하고 싶다”고 밝혔다. 박 감독은 “골프는 어려울 때나, 즐겁고 기쁠 때나 항상 내 곁에 있는 훌륭하고 믿음직한 친구”라면서 “10년, 20년이 지나도 지금처럼 열심히 일하는 박세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최명식 기자 mscho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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