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민의 오페라 문화사 - ⑧ 바로크 시절 英‘서민 오페라’
■ 예술 미학
18세기초‘거지 오페라’타락한 정치인·악명높은 범죄자 풍자… 혼돈의 英사회 코믹하게 담아
이탈리아 정통오페라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한 발라드오페라, 현대 뮤지컬 탄생의 든든한 밑거름으로
◇영국의 서민 오페라
18세기 초·중반 런던에서 유행했던 ‘발라드 오페라’는 바로크 시절 서민 오페라의 대표적인 예다. 발라드 오페라는 낱장 악보로 판매되던 소박한 ‘발라드’ 노래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런던 중산층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았고, 혼돈된 당시 영국 사회상을 위트와 날카로운 풍자 정신으로 그려내어 큰 인기를 끌었다.
‘거지 오페라’(1728, 링컨스 인스 필즈 극장)는 발라드 오페라의 인기에 불을 지핀 작품이다. 이 오페라는 재치 넘치는 유머와 당시 영국의 정치·사회 상황, 유명 인물들에 대한 풍자를 담아 런던 중산층 관객에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대본을 쓴 존 게이(1685∼1732)와 편곡을 맡은 요한 크리스토프 페푸쉬(1667∼1752)는 파리 보드빌 극장에서 쌓은 오랜 경험을 가지고 영국 버전의 코믹 오페라를 시도했다. 이 오페라의 탄생에는 영국의 유명한 시인이던 알렉산더 포프(1688∼1744)와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도 한몫했다. 이들은 시인이자 극작가, 존 게이에게 뉴게이트 감옥을 배경으로 한 도둑과 창녀들의 ‘전원극’을 제안했지만, 존 게이는 전원극 대신 풍자적 성격의 오페라를 택했다.
줄거리는 이렇다. 먼저 본격적으로 극이 전개되기 전에 거지 한 명과 ‘기도하는 사람’이 작품의 의도와 배경을 설명하고, 이어지는 극중극은 부패한 ‘도둑 저승사자’(피첨)와 남자 없이는 잠을 못 자는 끼 많은 딸(폴리),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낭만적’ 노상강도(매키스)에 대한 이야기다. 피첨은 아내로부터 딸 폴리가 매키스와 비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격분하지만, 곧 생각이 바뀐다. 매키스를 경찰에 밀고해 교수형에 처하게 하고 과부가 된 딸을 이용해 그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로맨틱 추리소설에 나올 법한 흥미로운 음모다. 폴리로부터 음모 사실을 알게 된 매키스는 몇 차례의 도망과 밀고, 탈옥, 삼류 치정 사건 등을 거친 끝에 결국 뉴게이트 감옥에 갇혀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데, 사형 직전에 ‘저자’인 거지와 ‘기도하는 사람’의 개입으로 사형을 면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정통 오페라처럼 3막 오페라의 외양을 갖추긴 했지만, 실제 알맹이는 노래가 섞인 소박한 연극에 더 가까웠다. 정식 오페라처럼 노래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되 난해하고 재미없는 레치타티보(대화풍 노래) 대신 연극 대사를 사용했고, 아리아에 해당하는 정식 노래들은 쉽고 재미있는 선율로 관객의 눈높이를 낮췄다. 서곡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곡이 새로 작곡한 게 아니라 기존 노래들을 극 내용에 따라 가사만 바꾼 형태였다. 존 게이는 45개의 장면과 69개의 짤막한 노래를 탄탄한 구성력으로 매끄럽게 연결했고, 편곡을 맡은 페푸쉬는 헨델, 퍼셀 오페라의 유명 노래(아리아와 에어)와 낱장 판매로 인기를 끌던 대중 노래(발라드), 민속 노래, 교회 찬송가 등을 파스티셰(반죽) 식으로 뒤섞은 우스꽝스러운 모방으로 극에 냉소성을 더했다.
◇정통 오페라 뒤틀기
이 오페라를 초연한 극장이 소박한 연극 공연을 하던 링컨스 인스 필즈 극장이라는 사실은 이 작품의 사회고발적 이슈와 세태 풍자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당시 런던에서는 이 극장과 드루리 레인에서만 연극 공연이 허용됐고, 이탈리아 정통 오페라는 헤이마켓에 위치한 화려한 오페라하우스인 킹스시어터에서 공연됐다) 입소문을 타고 이 극장에 몰려든 런던의 중산층 관객들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패러디한 이 오페라의 내용을 따라가면서, 비싼 티켓 값을 내고 오페라하우스의 박스석에 앉아 뜻도 모르는 오페라를 감상하며 거드름 피우던 런던 상류층의 속물근성과 현학성에 한바탕 통쾌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밑바닥 인생들의 대사에 장식적으로 사용된 셰익스피어풍의 고풍스러운 운율과 고급 어휘도 런던 부유층에 대한 조롱과 반항의 장치였다.
◇저항과 풍자 정신
이 작품은 동시대 영국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의 풍자소설 ‘걸리버 여행기’(1726)와 차세대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1812∼1870)의 ‘올리버 트위스트’(1837)를 읽는 듯하다. 극작가 게이의 풍자 정신은 상류층 오페라 관객에 대한 고발을 넘어, 부패 정치와 극심한 빈부격차, 불평등, 도둑, 창녀, 도시 빈민의 이슈를 겨냥했다. 이를 위해 게이가 택했던 방법은 당시 런던의 두 연극 극장(링컨스 인스 필즈, 드루리 레인)이 관객 유치를 위해 경쟁적으로 소재로 택하던 런던 일간지의 각종 범죄 기사에 나오는 악명 높은 범법자들에 대한 풍자였다.
이 작품에서 폴리의 아버지 피첨은 ‘도둑 잡는 저승사자’로 유명했던 실존 인물, 조너선 와일드(1682∼1725)와 ‘위대한 부패자’라는 별명을 가진 당시 토리당의 타락한 총리, 로버트 월폴(1676∼1721)을 빗댄 것이다. 그중 와일드는 런던 지하세계의 제왕으로 경찰과 결탁해 체포된 범죄자들에게 뇌물을 받고 감옥에서 빼내거나 사조직으로 범죄를 저지르며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그런데, 당시 ‘거지 오페라’를 관람한 런던 시민들은 이 오페라를 월폴 총리에 대한 공격으로 봤다. 어떤 점에서 이 작품의 남자들(피첨, 로킷, 매키스)은 모두 월폴 총리의 타락한 캐릭터를 갖고 있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월폴 총리는 ‘거지 오페라’의 후속작으로 나온 ‘폴리’에 대해 공연금지 처분을 내렸다. 이 때문에 ‘폴리’는 1729년 출판돼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1777년 이전까지 무대에 올리지 못했다.
한편 이 작품에서 매키스는 ‘낭만적 노상강도’였던 클로드 뒤발(1643∼1670)과 어린 탈옥범 잭 셰퍼드(1702∼1724)를 하나로 합친 형태였다. 이 중 뒤발은 영국 왕정복고 시절 유명한 프랑스 출신의 노상강도로, 쇠락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영국에 건너온 그는 폭력을 싫어해 강도질을 하면서도 예의를 다했고 특히 여자에게 기사도 정신을 발휘했다. 셰퍼드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절도와 강도죄로 뉴게이트 감옥에 갇힌 죄수로, 네 번에 걸친 탈옥으로 신문의 1면을 장식한 끝에 결국 교수형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오페라에 나오는 매키스의 이중적 면모, 즉 창녀들을 착취하고 이중결혼을 하는 파렴치한 바람둥이로서의 안티 히어로(반영웅)의 면모와 폴리의 간계로 수차례의 투옥과 탈출 끝에 사형의 위기에 처하는 영웅적 면모의 이중성은 실존 인물로 신문 지상을 오르내렸던 뒤발과 셰퍼드가 보여준 당시 런던의 어두운 사회상과 일반 대중의 심리를 절묘하게 담아낸 것이었다.
‘거지 오페라’의 명성은 동시대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1697∼1764)가 그린 일련의 풍자 회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호가스는 런던으로 상경한 시골 처녀가 먹고살기 위해 창녀가 돼 수감되고 성병으로 죽어가는 과정(‘어느 매춘부의 일생’, 1732)과 도박, 매춘으로 점철된 재벌 2세의 방탕한 삶(‘난봉꾼의 행각’, 1732∼1735), 돈과 신분에 좌우된 잘못된 결혼 관습(‘혼인의 방식’, 1743∼1745) 등 시리즈물로 예리하게 영국 사회의 병폐를 꼬집은 화가로 유명했다. 호가스의 한 그림(1728/1729년 분필화와 유화)은 얼핏 보면 ‘거지 오페라’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평범한 그림 같지만(두 여인 폴리와 루시가 각자의 아버지에게 애인 매키스를 살려 달라 애원하는 모습), 런던 상류층의 유유자적한 모습(좌우·호화로운 오페라하우스에서 헨델풍 수입 오페라를 관람)과 격분한 민중의 모습(뒷배경)이 묘한 대비를 이루며 예리한 사회비판의식을 보여준다.
호가스의 또 다른 그림(‘분노한 음악가’, 1741)은 ‘거지 오페라’의 연주에 참여하는 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창밖의 시끄러운 소리에 화를 내는 코믹한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민중과 귀족, 대중음악과 엘리트 음악의 갈등을 드러낸다. 임신한 여자 노래꾼(왼쪽)은 창녀의 신분을 암시하고, 원근법에 맞지 않게 큰 비율로 그려진 젊은 우유팔이 처녀(중앙) 주변을 둘러싼 가난하지만 건강한 서민들의 모습(칼갈이 장수, 떠돌이 오보에 연주자, 거리 청소부, 드럼 치는 소년, 나팔상인)은 민중을 대변한다.(Bond, 2006, 192)
‘거지 오페라’로 대표되는 영국의 발라드 오페라의 유행은 뜻도 모를 외국어로 부르는 “정통 오페라의 지방질을 덜어낸 군살 빼기, 즉 정화(淨化)”의 결과였다.(Mordden, 1980, 47). ‘거지 오페라’가 보여준 세태풍자와 사회비판의 정신은 19세기 후반 오펜바흐, 길버트. 설리번의 오페레타와 브레히트가 대본을 쓴 뮤지컬 ‘서푼짜리 오페라’(쿠르트 바일 작곡·1928) 등으로 이어지면서 현대 뮤지컬의 태동에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경희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 용어설명
데우스엑스마키나 : 바로크 오페라에서 해피엔딩을 위해 신이 기계장치(마키나)를 타고 내려와 인간들의 심각한 사연을 해결해주는 기법
뉴게이트 감옥 : 1188년부터 1902년까지 존속한 런던의 악명 높던 감옥. 중죄인을 쇠사슬에 묶어 지하 토굴에 가둔 후 사형에 처했고, 병이 들어도 의사의 치료를 받지 못하는 등 잔인한 감옥의 대명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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