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공무원들의 소신에 찬 전문성이 관료 주도 국가발전 모델을 성공시킨 공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필자가 외무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30여 년 전, 군사독재 정부 시절에도 최소한 경제나 외교 분야는 국가이익을 잣대로 전문정책을 마음껏 펴도록 정치권력이 보장했다. 국익(國益)이 점점 커질 수 있었고 그 혜택을 모두가 누려왔다.
오늘의 공직사회는 전문가 수난시대다. 경제정책으로 잔뼈가 굵은 경제 관료들이 추락하는 한국경제의 해법이 ‘소득주도성장’에 있다고 고수해야 한다. 외교 현장을 누빈 외교관들이 외교 분야의 적폐청산과 ‘반일 민족주의 외교’를 외쳐야 한다. 일본의 견제로 인해, 최고 수준의 다자경제협정인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가입할 수 없는 걸 통상 관료들은 지켜봐야 한다. 안보 전문가는 청와대에서 갑자기 내려오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파기와 번복 결정을 옹호하는 임기응변도 해야 한다. 원전 전문가는 근거 없는 탈원전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해야 한다.
2018년 8월 소득 하위 20% 가구 소득이 감소했다는 통계 발표를 이유로 통계청장이 전격 경질되자, 전문 분야로서의 통계행정은 사망 선고를 받았다.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초기에 확산을 막지 못한 것은 2월 2일 중국으로부터의 입국금지를 결의한 중앙사고수습본부 회의 결정을 2시간 후에 정치적으로 번복했기 때문이다. 긴급재난지원금을 100% 지급하느냐, 70% 지급하느냐 하는 논쟁에 있어, 마땅히 있어야 할 재정 전문가의 의견 제시는 경고 감이다. 총리가 “기재부 공직자가 뒷말하고 있다”며 공식 경고를 하면서, 재정행정은 재갈이 물려졌다.
정치적 성격의 업무는 여지없이 청와대에서 하향식으로 전달된다. 나중에 적폐로 몰릴지 모르니 상사가 지시하는 내용을 하급자가 녹음하거나 기록해 두는 건 공직 문화가 됐다. 무엇이 국가이익인지는 격의 없는 전문가 토론을 통해 비로소 도출되는 데도 그런 식의 토론 문화는 실종됐다. 최고 학벌이나 전문성이 오히려 고위직 승진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주사파·민변 출신이나 현 정권에 우호적 입장을 보인 민간인들은 어느새 대거 해외 공관장에 임명돼 있다. 이들이 주로 선호하는 공관을 차지하니 직업외교관들은 이들 피해 가기 바쁘다. 국내정치 외풍이 내부 깊숙이 부는 직업공무원제 환경에서 자신의 신념은 버리고 이념정책의 추종자로 발 빠르게 변신해야 한다. 공직 적폐청산의 결과물은 전문성의 추락이고 공직 가치와 문화의 변질이다. 고위공직 개혁을 외치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를 하반기 최대 현안으로 추진할 것이니, 또 다른 적폐청산이 기다리고 있다.
집권자의 기본 임무는 정책목표 설정은 하되 정부 구성원의 소신에 찬 전문성이 최대로 발휘되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다. 창의력과 혁신 의지가 발현될 수 있는 공직 토론 문화와 신뢰 형성도 중요하다. 구한말에 버금가는 격랑의 바다 한가운데서 한꺼번에 한국호(號)를 개조하려는 섣부른 권력 의지만 보인다. 선거로 집권한 정치세력은 헌법체제 내에서 일정 기간 항해권을 위임받았을 뿐이다. 선장은 승선인 모두의 이익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릴 의무가 있다. 그런데 선박 자체를 소유한 듯 전면 개조 작업을 하며 승객 청소까지 하려 한다. 공수처가 설치되면 이런 식의 항해는 가속화할 것이다. 진정한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던 군사정부마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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